핏물로 쓴 계약

by 돌부처

시간이 얼어붙었다. 한남대교 위를 휘감는 차가운 강바람도, 경찰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도,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도. 그 모든 것이 하진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잃고 아득한 배경으로 멀어졌다. 그녀의 시야에는 오직 노트북 화면 속, 빛바랜 사진 한 장만이 존재했다.


어머니였다. 그리고, 나였다.


어색하게 교복을 입고, 낯선 어른들 틈에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열일곱의 서하진. 그 옆에서, 세상의 모든 자애로움을 담은 듯 온화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서미령. 그리고 반대편에는, 이제 막 정치계에 발을 들여 야망으로 번뜩이는 젊은 시절의 박영규 의원. 세 사람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서로 다른 세계의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사진은 그들이 한 시간, 한 공간에 함께 존재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들이밀고 있었다.


“서하진 씨, 정말 당신은 저 남자를 모릅니까? 당신 어머니는... 저 남자와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거죠?”


윤도진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이 되어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공범을 추궁하는 형사의 날카로운 심문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비현실적인 감각을 믿어주겠다던 남자의 눈에는, 이제 싸늘한 의심과 배신감마저 서려 있었다.


“몰라요.”


하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갈라져 나왔다.


“나는... 저 사람을 몰라요. 저런 사진, 기억에 없어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 날에 대한 기억이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정교하게 도려낸 것처럼. 하지만 기억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더 끔찍한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 씨 가문은, 중요한 순간마다 ‘대가’로 기억을 지우는 의식을 행해왔으니까.


“기억에 없다?”


윤도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에는 하진의 부정이 서툰 거짓말이나 회피로 비칠 뿐이었다.


“당신 어머니와 유력 정치인이 함께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 당신까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요? 이게 평범한 일로 보입니까? 서미령 씨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저 ‘무당’이 아니었어.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었고, 당신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거요.”


“아니에요!”


하진은 소리쳤다. 그녀는 윤도진에게 소리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드는 이 잔인한 사진을 향해, 그리고 사진 속에서 너무나도 평온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절규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돈과 권력에 빌붙어 굿을 파는, 그런 흔한 장사치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사진 속 어머니의 미소는, 하진의 믿음을 비웃고 있었다.


그녀가 극심한 혼란으로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민준이의 차가운 기척이 느껴졌다. 아이의 영혼은 그녀의 격렬한 감정의 동요에 이끌려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거짓말....’


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저 아줌마... 웃고 있지만... 슬퍼 보여... 그리고... 추워 보여....’


민준이의 말과 함께, 하진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눈앞의 한남대교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더니, 그 위로 빛바랜 사진 속의 그날 풍경이 덧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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