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의 공기는 더 이상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압력을 가진 액체처럼 무겁고 끈적하게 하진의 온몸을 짓눌렀다. 숨을 쉴 때마다 유리 조각이라도 삼키는 듯 목구멍이 아려왔다. 거실 테이블 위, 펼쳐진 어머니의 비망록. 그 위에 쓰인 검붉은 글씨는 단순한 잉크 자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저주였다. 글자 하나하나가 심장을 가진 것처럼 미세하게 고동치는 것 같았고, 아직 마르지 않은 표면에서는 비릿하고 달큼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
‘네 어미는 약속을 어겼다.’
‘이제, 그 빚은 네가 갚을 차례다.’
그것은 경고나 협박이 아니라, 이미 집행이 시작된, 거부할 수 없는 판결문이었다. 백면도깨비는 그녀의 가장 안전한 공간, 그녀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던 마지막 성역에, 자신의 존재를 낙인처럼 찍어놓고 사라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아니었다. 가그는 언제든 그녀의 삶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압도적인 포식자였다.
“하아... 하....”
하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놈의 기운이, 그 차갑고 오만한 존재감이 이 집 안 구석구석에 뱀의 허물처럼 스며 있었다.
‘민준아....’
그녀는 속으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전까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던 아이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겁을 먹고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하급 영가인 민준의 영혼은, 백면이라는 상위 존재의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미약한 촛불에 불과했다. 하진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다시 한번 비상벨을 울렸다. 이 집을 버리고, 이 도시를 떠나,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핏물로 쓴 계약서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그녀의 영혼 자체에 새겨진 족쇄라는 것을. 어디로 도망치든, 이 빚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올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여는 간단한 동작조차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손가락은 사정없이 떨렸고,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다. 간신히 잠금을 풀고, 그녀는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유일하게 이 비현실적인 공포를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윤도진 형사.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이내 그의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하진 씨? 무슨 일입니까.]
“형사님....”
하진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그놈이... 그놈이 우리 집에... 다녀갔어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누가 침입했다는 거요?]
윤도진의 목소리에 형사 특유의 경계심이 묻어났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나타났어요. 그리고... 메시지를 남겼어요. 책상 위에... 어머니 공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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