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의 공기가 멎었다. 시간조차 흐름을 멈춘 듯, 모든 것이 그 까맣게 탄 가면 조각을 중심으로 응고되었다. 하진의 세계는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에서는 쇠가 긁히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그녀는 어머니의 필체로 쓰인 그 잔인한 문장을 몇 번이고 되읽었다.
‘내 딸을 주마.’
그것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피와 영혼, 그리고 절망이 담긴 살아있는 계약서였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려 한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 그녀가 평생을 사랑하고, 원망하고, 그리워했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한순간에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배신자로 전락했다.
“아니야....”
하진은 짐승처럼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아니야. 이건... 당신들이 꾸며낸 거야. 우리 엄마 필체는... 맞아. 하지만 이건... 이건 엄마가 쓴 게 아니야. 그놈이... 백면이 엄마를 조종해서....”
그녀의 부정은 필사적이었지만, 공허했다. 그녀 자신조차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녀의 피가, 영혼이 알고 있었다. 저것은 진짜다. 저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조종?”
가장 어른인 서명진이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가볍게 내리쳤다. 쿵, 하는 낮은 소리가 하진의 심장을 직접 때리는 것 같았다.
“네 어미가 그깟 도깨비 따위에게 조종당할 위인으로 보이더냐! 그 아이는 가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신기(神氣)를 타고났고, 가장 교활하게 신과 도깨비를 부리던 년이다. 조종을 당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거래를 했고, 제 손으로 저 계약서에 피를 묻혔다!”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한때 총애했던 조카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묻어났다.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윤도진이 나섰다. 그의 얼굴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형사로서의 냉철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 잠시만 진정하시죠.”
그는 하진의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나아가며, 서명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것이 서미령 씨의 필체인지는 국과수에서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 물건의 출처를 밝히지 않으시면, 저희는 어르신들을 공무집행방해 및 증거 은닉 혐의로 조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법을 집행하는 자의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서명진은 코웃음 쳤다.
“법? 애송이로구나.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속세의 법을 들먹이는가. 이곳은 신의 영역이고, 우리는 신의 법도를 따른다.”
그녀는 윤도진을 무시하고, 하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저것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하렷다. 네 어미가 마지막 굿판을 벌인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경기도 외곽의 이름 없는 신당? 아니. 그곳은 눈속임이었을 뿐이다. 그년이 진짜 금기의 굿판을 벌인 곳은, 바로 이 집, 이 대청마루 아래에 있는 우리 가문의 지하 신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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