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기억

by 돌부처

시간의 강 가장 깊은 바닥.


모든 기억이 삭아 먼지가 되고,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무(無)로 돌아가는 망각의 심연. 하진의 희미해져 가던 의식은, 이제는 거의 환청처럼 들리는 이모의 애처로운 부름과, 눈앞에서 유령처럼 깜빡이는 기묘한 푸른빛에 의지해 간신히 소멸을 면하고 있었다.


‘가야 해... 저 빛으로....’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기어가는 벌레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의지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그 빛을 향해 헤엄치듯 나아갔다. 가까워질수록, 빛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장면’을 영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강물 속에 가라앉은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파편들처럼 무질서하게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익사 직전의 그녀를 위해 일부러 그곳에 띄워놓은 구명튜브처럼, 고정된 채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침내 빛의 근원에 닿은 순간, 하진의 의식은 저항할 틈도 없이 다시 한번 그 기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너무나도 낯익은, 그리고 두려운 공간. 서 씨 가문 본가의 지하 신당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제단은 지금보다 더 낡아 보였고, 벽의 부적들은 훨씬 더 선명하고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간대는 박영규와의 금지된 계약이 이루어진 바로 그날 밤인 듯했다.


신당 안에는 어머니 서미령이 혼자 있었다. 그녀는 갇힌 짐승처럼 신당 안을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고요하고 자애롭던 대무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자의 깊은 후회로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혼잣말을 퍼붓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리석은 것, 어리석은 서미령!”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은 신을 모시는 사제가 아닌, 나약하고 고통받는 한 명의 인간, 한 명의 어머니였다.


“그저...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이 지긋지긋한 장녀의 숙명 따위에서 벗어나, 내 딸만큼은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힘이 필요했어. 가문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속세의 권력이라는 더 높은 방패가...!”


그녀의 독백은 처절한 자기변명이자, 참회였다. 딸을 가문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그릇되고 뒤틀린 모정의 발로.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그녀와 그녀의 딸을 더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 제단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르르, 백면의 형상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어둠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뚜렷한 인간의 형체에, 칠흑 같은 도포를 입고, 그 위에 새하얀 가면을 쓴 모습. 계약을 통해 그녀의 욕망을 양분 삼아, 훨씬 더 강력하고 완전한 형태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후회하는가, 신의 피를 이은 딸이여.]


백면의 목소리는 조롱과 깊은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그의 존재만으로 신당 안의 모든 촛불이 파랗게 질리며 흔들렸다.


[인간의 가장 어리석고도 사랑스러운 점은, 언제나 선의를 명분으로 최악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지. 너 역시 예외는 아니었군.]


“닥쳐, 이 더러운 것!”


서미령이 상처 입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딸아이가 성인이 되어 신혈(神血)이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나는 반드시 너를 봉인하거나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봉인? 소멸? 하하하. 가엾고도 순진한 것.]


백면은 인간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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