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멎었다. 아니, 세계의 근원적인 법칙이 다시 쓰이고 있었다. 뱀의 굴처럼 사악하고 축축한 기운으로 가득 찼던 지하 신당은, 하진의 몸을 빌려 강림한 ‘문지기’의 존재감 앞에서 봄눈 녹듯 스러지고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태고의 신성을 품은 기운이었다. 그것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벼린 강철처럼 단단하며, 만년설이 쌓인 영산(靈山)처럼 장엄했다.
서명진과 서은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경외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깨웠는지, 자신들의 무모한 굿판이 어떤 존재를 현실로 불러냈는지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평생을 모셔온 가문의 수호신들이나, 거래하고 달래 왔던 산신, 용신 따위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훨씬 더 위험하며, 인간의 기원과 이해를 초월한 힘. 서 씨 가문의 피가 시작된 태초부터,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가문의 계약과 운명을 감시해 온 ‘수호자’이자 ‘심판자’. 역대 수많은 장녀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가장 강인한 영혼만이 아주 짧은 순간 감응했다는 전설 속의 ‘문지기 신’이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네까짓 미숙하고 어린 계집의 몸뚱이가 감히 ‘그분’을 온전히 담아낼 그릇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백면의 그림자가 부정과 공포가 뒤섞인 외침을 토해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오만함과 여유 대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는 그림자의 형태로나마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었다. 상대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 기운의 무게와 깊이만으로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흉내나 허세가 아니었다.
하진의 몸을 빌린 문지기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수백 년 묵은 고목이 가지를 뻗듯 느리고 우아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먼지로 되돌릴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이 고요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감정 없이, 벌레를 보듯 백면을 꿰뚫어 보았다.
“네놈의 그 천박한 지혜로 어찌 알겠느냐. 이 아이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장녀가 아니다.”
문지기의 목소리는 신당 전체를, 그리고 그 너머의 공간까지 울렸다. 그것은 성대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닌, 영혼의 중심에서 직접 울리는 소리였다.
“이 아이의 영혼은, 역대 그 어떤 장녀보다도 맑고 강인하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시간의 강을 건넜고, 네놈이 쳐놓은 거짓된 기억의 함정을 제 의지만으로 깨뜨렸으며, 무엇보다....”
문지기는 희미하게, 인간의 것이 아닌 초월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를 깨울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 영혼 스스로가 증명해 보였다.”
[같잖은 소리! 네놈이 진짜 문지기라 한들, 지금은 고작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육신에 깃든 상태!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의 반의반도 제대로 쓰지 못할 터! 지금의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허세를 부렸지만, 백면의 그림자는 이미 미세하게 떨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도망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의 근원인 ‘두려움’과 ‘욕망’이, 이 고대의 존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문지기는 놀랍게도 순순히 인정했다.
“이 그릇은 아직 너무 연약하고 미숙하여, 내가 가진 본래 힘의 전부를 감당해내지는 못하지. 이 아이의 영혼이 부서지지 않게 하려면, 힘을 억제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마치 처음 움직여보는 것처럼 어색하게, 하진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백면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그 동작은 지극히 단순했지만, 그 손끝에는 우주를 멸할 수 있는 힘의 편린이 서려 있었다.
“네놈 같은 천하고 버러지 같은 도깨비 한 마리를 벌하는 데는, 이 정도 힘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 순간, 하진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번개와도 같았고,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빛은 소리도 없이, 공간과 시간을 무시하고 날아가, 백면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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