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도진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있는지 더 이상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의 차 안에서 절망과 공포에 질려 가냘프게 떨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서하진은 분명 같은 얼굴, 같은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존재의 본질이, 영혼의 무게가 송두리째 바뀐 것 같았다. 이전의 그녀가 강풍 앞의 위태로운 유리그릇 같았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 안에 고요하지만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푸른 불꽃을 담은, 천 번을 벼린 강철 그릇 같았다.
“괜찮아요, 형사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지쳐 있었고, 핏기 없는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화강암처럼 굳건했다.
“이제... 반격할 시간이에요.”
그녀의 손에 들린, 새벽의 여명을 담은 듯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옥 조각이 신비롭게 빛났다. 그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 한마디에, 지하 신당에서 나온 가문의 어른들이 일제히 숨을 삼키며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더 이상 하진을 ‘어리고 철없는 장녀’나 ‘가문을 등진 탕아’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의 흔적을 향한 경외심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새로운 심판자를 향한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장 먼저 예를 갖춘 것은, 서 씨 가문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절대적인 권위였던 최고 어른 서명진이었다. 그녀는 늙고 앙상한 몸을 주저 없이 바닥에 조아리며, 하진이 아닌, 그녀의 안에 잠들어 각성한 ‘문지기’의 편린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의 오만함과 질책 대신, 깊은 존경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어리석음과 나태함으로, 문지기님의 새로운 그릇이 되실 장녀님을 시험에 들게 하고 고통 속에 홀로 두었던 죄,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녀의 행동은 신호탄이었다. 이모 서은영을 비롯한 다른 어른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 엎드려 깊이 머리를 숙였다. 서 씨 가문 수백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례 없는 일이었다. 가문의 절대적인 위계질서와 권위의 정점이었던 어른들이, 가장 어리고 미숙하다 여겼던 장녀에게 완전한 복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이었다.
하진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그녀는 문지기가 자신의 몸에 강림했던 순간과 그가 남긴 말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시간의 강에서 마주했던 어머니의 참혹한 진실과, 온몸을 찢는 듯한 고통뿐이었다.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제발.”
“아닙니다, 장녀님.”
서명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바닥에 이마를 댄 자세 그대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 이 서 씨 가문의 주인은 저희 늙은이들이 아니라, 문지기님의 뜻을 몸소 받드는 장녀님이십니다. 지금부터 이 가문이 수백 년간 쌓아온 모든 비기와 신물, 그리고 저희들의 남은 목숨까지... 오직 장녀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맹세가 아니었다. 낡은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가문의 권력이, 운명의 주도권이 완벽하고도 거부할 수 없게, 하진에게로 넘어왔음을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윤도진은 이 비현실적이고도 장엄한 광경을, 마치 잘 짜인 연극의 이방인 관객처럼 입을 벌린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는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기괴하고 폐쇄적인 권력 승계처럼 보였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거대한 영적인 질서의 변화를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대청마루. 하지만 그곳의 공기와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팽팽한 대립과 질책, 의심의 기운은 사라지고, 이제부터 시작될 거대한 전쟁을 앞둔 결사대의 그것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진은 더 이상 죄인처럼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른들의 간곡하고도 단호한 청에 의해, 이전에는 오직 가문의 최고 어른만이 앉을 수 있었던, 가장 깊고 높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윤도진은 어색하게나마 그녀의 곁, 중요한 손님이자 동맹의 자리에 앉았다.
이모 서은영이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차를 내왔다. 인삼과 대추, 그리고 기력을 보하는 귀한 약재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하진은 차갑게 식은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뜨거운 온기가 손끝을 통해 마비되었던 혈관으로 퍼져나가자, 비로소 자신이 지옥 같은 시간의 강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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