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로 읽는 언어

by 돌부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의 공기는 떠나올 때와 완전히 달랐다. 칠흑 같던 어둠은 동쪽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옅푸른 새벽빛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하진에게는 그저 하룻밤이 지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 자신의 운명과 가문의 역사를 통째로 짊어지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에서의 도망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을 되찾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되돌아가는 전사였다.


차 안의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하거나 무겁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을 확인하고, 보이지 않는 전선으로 나아가는 동지 사이의 굳건한 침묵이었다. 윤도진은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해야 할 피해자나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존재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벌어질 거대한 전쟁의 사령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윤도진이 물었다.


“당신의 집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가문에서 마련한 안전가옥이라도....”


“아니요.”


하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서울의 풍경은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그저 회색빛 건물과 아스팔트의 집합체로 보였다면, 지금은 도시 전체를 휘감고 흐르는 거대한 기운의 흐름이 보였다.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탁하고도 강렬한 에너지의 강. 그리고 그 강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도시의 탁한 기운을 양분 삼아 거대한 거미줄을 치고 있을 백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싸움은 이곳에서 벌어져요. 가장 평범하고, 가장 많은 욕망이 들끓는 곳에서. 숨을 곳은 없어요. 오히려 가장 중심부로 들어가야 해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형사님께서 마련해 주실 수 있는, 가장 눈에 띄지 않고, 가장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우리의 작전 기지가 될 곳이요.”


윤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핸들을 돌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적당한 곳이 하나 있소.”


그가 도착한 곳은 재개발이 멈춘 채 유령처럼 버려진 구도심의 한 낡은 상가 건물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셔터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는, 경찰이 비밀 작전을 위해 임시로 사용하다 버려둔 안전가옥이었다. 도청 방지 장치와 최소한의 통신 설비, 그리고 두꺼운 강철 문. 세상과 단절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여기라면, 적어도 인간들의 감시는 피할 수 있을 거요.”


윤도진은 발전기를 돌려 최소한의 조명을 켰다. 차갑고 메마른 공간에 하진과 그, 단둘만 남았다. 이곳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수첩을... 가져와 주세요.”


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윤도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증거물 보관실에서 해당 물품을 반출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 홀로 남은 하진은 텅 빈 공간의 한가운데 가만히 섰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푸른 옥 조각을 꺼냈다. 문지기가 남기고 간 힘의 편린. 그것을 쥐자,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밤새 소진했던 기력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심장 깊숙한 곳, 이전에는 없었던 작은 불꽃이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문지기의 힘. 그것은 아직 너무 작고 미약해서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었지만, 세상의 기운을 ‘읽는’ 새로운 감각을 그녀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안전가옥 주변을 흐르는 기운을 느꼈다. 멈춰버린 시간의 먼지,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희미한 감정의 잔상.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악의적인 감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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