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감히.”
목소리는 분명 하진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것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윤도진의 희생이 만들어낸 슬픔과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의 용광로가, 그녀 안의 모든 이성적인 벽을 녹여 허물고,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문지기의 의식을 다시 한번 현실의 표면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전의 완전한 강림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문지기의 신성한 분노와 하진의 인간적인 절망이 불안정하게 하나로 뒤섞여,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하고 폭발적인 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를 건드렸겠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공포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오직 눈앞의 적을 남김없이 불태워버릴 듯한, 차갑고 순수한 푸른 불꽃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해신의 인’은 더 이상 방어의 부적이 아니었다. 하진의 눈물과 피, 그리고 문지기의 신성한 분노를 매개로 흡수한 그것은, 푸른빛의 칼날처럼 빛나며 감히 형언할 수 없는 파괴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호오...?]
백면은 처음으로 표정 없는 가면 아래에서 순수한 흥미와 약간의 경탄이 섞인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발아래, 먼지처럼 쓰러져 미세하게 경련하는 윤도진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하진을 바라보았다.
[고작 하찮은 인간 벌레 한 마리의 죽음이, 네년 안에 잠들어 있던 그 오만한 녀석의 편린을 다시 깨울 줄이야.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예측 불가능해서... 재미있단 말이지.]
그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이전의 불완전한 강림에서 문지기의 힘이 제약이 많음을 확인했기에, 이번의 각성 역시 그저 감정에 휩쓸린 마지막 발악,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가장 밝게 타오르는 것과 같을 것이라 얕보고 있었다.
“너는....”
하진이 한 걸음,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내디뎠다. 그녀의 발걸음에, 백면의 분노로 얼어붙었던 바닥이 녹아내리고, 검게 그을렸던 자리가 정화되듯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의 고귀한 희생과 목숨 값으로, 네놈이 이 땅에 존재하며 저지른 모든 죄의 무게를 뼛속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녀는 손에 든 ‘해신의 인’을 검을 쥐듯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왼쪽 가슴을 그 부적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깊게 베었다. 옷이 찢기고 연약한 살갗이 베이며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그 피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부적의 푸른빛 속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며, 그 빛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성스럽게 증폭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력을, 자신의 피에 담긴 문지기의 신성력을, 단 한 번의 공격을 위해 남김없이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 네 스스로 심장을 열어 제물이 되려는 게냐!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백면은 그제야 그녀가 하려는 짓의 무모함과 위험성을 깨닫고, 다시 한번 칠흑 같은 어둠의 창을 만들어 그녀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와 파괴력을 담아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진은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그녀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부적을 든 손을, 마치 세상을 심판하는 여신처럼 앞으로 내지르며, 칠흑의 창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다.
“흩어져라.”
그녀가 나직이, 하지만 절대적인 권위를 담아 명령했다.
그 순간, ‘해신의 인’에서 터져 나온 푸른빛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백면이 쏘아낸 어둠의 창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어둠은 빛 속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 줌의 연기도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소멸해 버렸다.
푸른빛의 파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백면이 만들어낸 결계 전체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며, 이 공간을 지배하던 모든 사악하고 탁한 기운을 근원부터 정화하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어둠이 걷히고, 검게 그을렸던 벽과 바닥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백면이 수백 년간 서울이라는 도시 위에 쳐놓았던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부가, 성스러운 불길에 타들어 가고 있었다.
[크...! 이 힘은...! 그때의 불완전한 힘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년, 대체 무슨 짓을...!]
백면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진의 힘은 단순히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본질 자체가 변해 있었다. 이전이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견고한 ‘방패’의 힘이었다면, 지금은 존재의 인과율 자체에 간섭하여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심판’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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