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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금제록 (禁祭錄)]

2화. 잔상 (殘像)

by 돌부처

사이렌 소리는 멀리서부터 울었다.


김정호 교수의 시신은 허무하게 흰 천으로 덮였다.

조사와 보고, 끝없는 질문들. 한지운은 기계처럼 사실만을 반복했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춥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망했습니다.”


군 수사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자신을 박 대위라고 했다. 닳아빠진 전투복만큼이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이 폭염에 춥다고요? 한 박사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들은 그대로입니다.”

“그 외에 다른 특이사항은? 목격한 것, 들은 것, 뭐든지 좋습니다.”


지운은 잠시 망설였다.

눈앞에 그날의 잔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멎어버린 세상의 소리. 추락하던 새 떼. 거울 속에 비쳤다던, 눈알 없는 노인.

김 교수의 눈에 서려 있던, 인간의 것이 아닌 원초적인 공포.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의 이성은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자연현상 따위는 없었다. 스트레스가 유발한 집단 히스테리일 뿐.

있을 리가.


박 대위는 지운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부검 결과가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짧게 경례를 붙이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사흘 후.

국립중앙박물관 제1 보존과학실.


세상은 김정호 교수의 죽음을 ‘기저질환 악화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으로 결론 내렸다.

부검 결과, 심장에서 미세한 파열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폭염 속 무리한 발굴 작업이 원인이었다.

TV 뉴스에서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DMZ의 발굴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봉합되었다.


‘역십이지신상 동경’.

군용 트럭이 아닌, 국방부 소속 특수무진동 차량에 실려 이곳, 한지운의 공간으로 왔다.

공식 명칭은 ‘군사지역 출토 미확인 금속 유물’.

분석 책임자는 한지운이었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라텍스 장갑을 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온도 20도, 습도 50%. 그의 세상.


하지만 특수 보관함의 육중한 잠금장치를 푸는 순간, 익숙한 한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DMZ의 그 서늘함.

에어컨 바람과는 종류가 다른, 뼛속을 파고드는 냉기였다.


지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뚜껑을 열었다.

음산한 녹청색 거울이 조명 아래 고요히 누워있었다.


“분석을 시작하지.”


그는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X선 형광분석기로 성분을 스캔하고, 감마선 투과 촬영으로 내부 구조를 살폈다.

납 동위원소를 분석해 제작 연대를 추정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그는 거울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몇 시간 뒤에 나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운의 세계를 다시 한번 흔들었다.


“말도 안 돼….”


모니터에 떠오른 데이터는 불가능을 외치고 있었다.

주성분은 구리와 주석. 일반적인 청동이었다.

하지만 0.001% 미만의 성분에서, 지구상에서는 극미량으로만 존재하는 이리듐(Iridium)과 오스뮴(Osmium)이 검출되었다. 운석에서나 발견되는 물질. 하늘에서 떨어진 쇠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더 기이한 것은 온도였다.

적외선 온도계의 숫자는 그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거울의 표면 온도는 항상 실내 온도보다 정확히 2.4도 낮았다.

열역학 제2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현상. 외부의 에너지 공급 없이 스스로 차가워지는 물질.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데이터. 그것은 마치 지운을 비웃는 것 같았다.


“대체… 정체가 뭐냐, 넌.”

그는 홀린 듯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뿌연 표면에는 조명이 흐릿하게 비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병사가 봤다는 ‘눈알 없는 노인’의 형상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거울 표면에 닿기 직전.

똑. 똑.


보존과학실의 두꺼운 방음벽 너머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운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분석 중일 때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누구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빨랐다.

똑. 똑. 똑.


지운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서늘한 복도 공기만이 그를 맞았다. 센서등은 꺼져 있었다.


“장난하나….”

그가 투덜거리며 문을 닫으려던 순간, 바닥에 놓인 작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런 글씨도 없는, 새하얀 편지 봉투.


안에는 빳빳한 한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만년필로 쓴 듯한, 단 한 줄의 문장.


『죽은 자의 것을 산 자가 탐하지 말라.』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건 경고였다. 누가. 어떻게. 이 박물관의 보안을 뚫고?

그는 미친 듯이 복도로 뛰쳐나갔다.


“거기 누구야!”

외침은 텅 빈 복도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CCTV를 확인해야 한다. 보안팀에 연락하자.

하지만 그의 발이 복도 끝에 닿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보존과학실 안에서, 무언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

분석대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 비커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지운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이 나온 문을 바라보았다.

자동으로 닫히던 문이, 어째서인지 10cm쯤 열린 채 멈춰 있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짙은 어둠 속에서.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이 놓여 있던 분석대 위.


그곳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무언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관절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어둠 속에서 지운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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