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담장 너머로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넘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1학년 12반 교실에는 향기 대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임 선생님인 최 선생이 걷어온 가정환경 조사서를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영아."
선생님의 부름에 진영은 쭈뼛거리며 교탁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안경 너머로 진영이 낸 조사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밤새 엄마가 고민 끝에 가짜로 채워 넣은 아버지의 한자 이름. 영화로울 영(榮), 빼어날 수(秀).
"영수? 한자가... 영화로울 영에 빼어날 수라..."
선생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직업은 '해외 건설'? 사우디?"
"네...."
"사우디 가서 돈 번다는 양반이, 집은 월세야?"
선생님은 혀를 차며 조사서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반 아이들이 다 듣는 앞에서였다.
"허허. 희안하네. 사우디에서 돈을 어엄청 벌텐데... 선생님한테 인사올 시간도 없이 말이야."
그 눈빛에는 명백한 경멸과 불신이 섞여 있었다. 엄마가 밤새 쥐어짜 낸 '서글픈 허세'는 선생님의 눈썰미 앞에서 단박에 발가벗겨졌다.
"들어가 봐."
돌아서는 진영의 뒤로, 선생님의 한마디가 날아왔다.
"잠깐만. 진영이 너, 근데 아버지 안 계시니?"
반 아이들이 다 듣는 앞에서였다. 교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네? 아닌데요?"
"그으래? 엄마는? 노점? 이게 뭐냐, 정확히 써야지."
"..."
"흐음."
선생님은 혀를 차며 조사서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표정에는 명백한 경멸과 귀찮음이 섞여 있었다.
"그래, 들어가."
그날부터였다. 선생님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은.
청소 당번을 정할 때, 부자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환경 미화'라며 꽃병 정리 같은 쉬운 일을 시켰다. 반면 진영과, 역시 형편이 어려운 기철이 같은 아이들에겐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장 정리가 떨어졌다.
"너희는 힘도 세고 씩씩하니까 잘할 거야, 그치?"
말은 칭찬 같았지만, 그건 명백한 차별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 문제 누가 풀어볼까? 우리 반장 민수?"
선생님은 민수 같은 아이들에게는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지만, 진영이 손을 들면 못 본 척 넘어가기 일쑤였다. 어떤 날 준비물을 깜빡 잊었을 때, 민수는 "다음에 가져와" 하고 넘어갔지만 진영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정 교육이 문제야, 가정 교육이. 집에서 신경을 안 쓰니 애가 이 모양이지."
그 말은 회초리보다 아팠다. 차라리 엉덩이를 맞는 게 나았다. 엄마를, 없는 아빠를 들먹이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진영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툭하면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흙장난을 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는 카네이션과 선물 세트로 화려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우리 엄마는 선생님한테 양주 사준대", "백화점 상품권 드린대" 하며 떠들었다. 진영은 그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며칠 뒤, 정희가 장사 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을 때였다. 채소가게 앞에서 무를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어머, 진영이 엄마 아니에요?"
반장 민수 엄마였다. 화려한 파마머리에 금목걸이를 한 그녀는 정희의 장바구니에 담긴 싼 식재료들을 힐끔거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정희는 얼른 무를 등 뒤로 감췄다.
"장 보러 나오셨나 봐요. 저기, 이번 스승의 날 말이에요."
민수 엄마가 본론을 꺼냈다.
"우리 반 엄마들끼리 조금씩 성의 표시 좀 하려고 하는데. 진영이 엄마도 같이 하실 거죠?"
성의 표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희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촌지였다.
"얼마나... 하면 될까요?"
"뭐, 형편껏 하는 거죠. 그래도 10만 원 정도는 해야 선생님 체면도 있고...."
10만 원.
포장마차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발이 부르트도록 팔아야 겨우 만질 수 있을까 하는 돈이었다.
"저기... 그런걸 꼭 해야 하나요?"
정희가 머뭇거리자 민수 엄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어머, 다들 자식 위해서 하는 건데. 진영이 학교생활 걱정 안 되세요? 요즘 최 선생님, 깐깐하시던데. 없는 집 애들이라고 밉보이면 큰일 나요."
그 말은 협박처럼 들렸다. 민수 엄마는 "잘 생각해 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채소가게를 나갔다.
그날 밤, 정희는 오뎅 국물을 끓이며 한숨을 쉬었다.
돈이, 이놈의 돈이 뭐길래. 내 자식 기까지 죽이고, 선생 비위까지 맞춰야 하나.
하지만 진영의 풀 죽은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전, "선생님이 나만 미워해" 하며 울먹이던 아이의 목소리.
내가 돈을 안 줘서 그런 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무시당하는 건가.
정희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정희는 결심했다.
그깟 돈, 주자. 줘서 내 새끼 기 펴게 해주자.
장사 밑천으로 꼬불쳐 둔 비상금을 꺼냈다. 구겨진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를 다리미로 펴서 하얀 봉투에 넣었다. 5만 원이었다. 그녀에게는 피 같은 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정희는 학교로 찾아갔다. 옷장에서 제일 멀쩡한 옷을 꺼내 입었지만,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교무실이 아니라 학교 뒤편 주차장에서 최 선생을 기다렸다. 최 선생님이 번쩍이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진영이 엄마입니다."
"아, 네. 무슨 일로...?"
선생님은 정희의 행색을 쓱 훑어보더니 시큰둥하게 물었다. 정희는 떨리는 손으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스승의 날도 다가오고 해서... 진영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혼자 키우다 보니 부족한 게 많습니다."
선생님은 봉투를 받아 들더니, 손끝으로 두께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봉투는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진영이가 참 착하죠. 근데 수업 태도가 좀 산만해서 걱정입니다. 뭐,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정희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고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비굴함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게 부모 노릇인가.
하지만 정희의 기대는 며칠 못 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날 오후, 진영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엄마...."
아이는 울먹이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 또 싸웠어?"
"선생님이... 청소 검사하는데, 나보고 화장실 냄새난다고... 다시 하라고...."
진영이 앙앙 울음을 터뜨렸다.
"나만 남아서 변기 닦았어. 선생님은 왜 나만 미워해!"
정희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봉투. 5만 원.
그 정도 액수로는 최 선생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걸로 누굴 놀리나' 싶어 더 괘씸해했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자의 성의는, 부유한 자들의 뇌물 앞에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정희는 우는 아이를 껴안았다.
내가 미쳤지. 그깟 선생 놈한테 돈을 쥐여주다니. 그 돈이면 우리 진영이 고기나 실컷 먹일걸.
그 놈의 돈. 먹고 죽을래도 없는 돈.
한 장. 한 장.
행여나 구겨진 돈을 보고 내 자식도 그렇게 볼까봐, 다리미로 몇 번을 꾹꾹 눌러서 고이 담았던 돈.
"진영아, 울지 마."
정희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기죽지마. 더 이를 악물고 공부해야돼.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되고, 돈 많이 벌어. 그래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한테 복수할 수 있어. 알겠어?"
정희는 자신의 입 밖에서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복수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진영이 정말로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빠져나가 저 넓은 세상에서 훨훨 날았으면 헀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당신들의 도움 없이도 나는 이 세상을 훨훨 날고 있다고.
자신은 이제 하지 못할 것을 아들이 대신 이뤄주길 바랬다. 그걸 위해 자신은 거름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영의 눈 속에 깃든 어둠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아이는 알 것 같았다. 냄새나는 건 변기가 아니라, 자신의 가난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냄새는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빈칸으로 가득했던 가정통신문처럼, 아이의 마음에도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