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 밤이었다. 며칠째 쏟아지던 비는 잠시 소강상태였지만, 밤하늘은 물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단칸방의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여덟 살 진영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저녁은 아까 먹었다. 부엌 찬장에 엄마가 남겨둔 식은 밥을 물에 말아 김치와 함께 넘겼다. 배가 차지 않았는지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프다기보다, 마음이 허해서 더 고픈 것 같았다.
"엄마 언제 와..."
벽시계는 이제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엄마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방 안 공기가 축축하고 서늘했다. 천장 구석에 핀 곰팡이 얼룩이 마치 괴물의 눈처럼 진영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바스락.'
쥐가 지나가는 소리일까. 진영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이불 속 어둠은 더 무서웠다. 결국 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에 나가 있자.'
방 안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밖이 나았다. 진영은 익숙한 듯 슬리퍼를 끌고 방을 나섰다. 주인집 할머니가 깰까 봐 살금살금 대문을 열었다.
골목 어귀는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진영은 전봇대 아래 쪼그려 앉았다.
여기 앉아 있으면 큰길에서 들어오는 차 불빛도 보이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 진영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엄마 보고 싶어...."
매일 밤 이렇게 골목 어귀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기다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진영은 벌떡 일어났다.
'엄마한테 가자.'
엄마가 일하는 포장마차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큰길을 건너고 시장 골목을 지나야 했다. 밤길을 혼자 걸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무서움을 견디는 것보다는 엄마 얼굴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진영은 걷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바닥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얇은 런닝셔츠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쌩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갈 때마다 진영은 움찔움찔 놀라 길가로 물러섰다. 술 취한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나갈 때는 전봇대 뒤에 숨어 숨을 죽였다.
한참을 걸었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찼다.
그때, 어디선가 무언가를 굽는 냄새가 났다. 매캐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냄새였다.
저 멀리, 익숙한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엄마의 포장마차였다.
천막 틈으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영의 눈에 안도감의 눈물이 고였다.
천막 틈으로 하얀 김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이모! 여기 꼼장어 한 판 더!"
"국물 좀 더 줘요!"
진영이 천막을 살짝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은 포장마차 안은 비를 피해 들어온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백열전구의 노란 불빛 아래, 정희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꼼장어를 뒤집느라 연기를 들이마시면서도, 국물을 퍼 나르고 술병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땀과 빗물, 그리고 연기에 젖은 엄마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진영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바쁘게 움직이던 정희의 눈길이 입구 쪽에 닿았다. 순간 정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빗물에 젖어 꾀죄죄한 몰골로 서 있는 아들. 반가움보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놀라움, 그리고 속상함이 먼저 치밀었다.
"어머! 너, 너 왜 나왔어! 이 밤중에!"
정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진영에게 다가왔다. 손님들의 시선이 아이에게 쏠렸다. 정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집에 혼자 있으믄 무서워서... 주인집 아줌마가 이제 잠잘 시간이라고 방에 혼자 가서 자라고...."
진영은 울먹이며 말했다.
정희는 굳은 얼굴로 진영을 구석 자리로 이끌었다.
"엄마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 빗속을 뚫고 오면 어떡해!"
말은 매섭게 했지만, 아이의 젖은 머리를 털어주는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아줌마, 애 배고픈가 본데 국수나 하나 말아줘요."
술 취한 손님 한 명이 혀 꼬인 소리로 거들었다. 정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재빠르게 국수 면을 삶아 그릇에 담았다. 뜨끈한 멸치 국물에 유부를 듬뿍 얹어 아이 앞에 놓았다.
"이거 먹고 빨리 들어가. 내일 학교가야 하잖아."
그제야 진영은 생글거리며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아들의 모습에 정희의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이모! 여기 소주!"
손님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정희는 다시 불 앞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희는 마음이 급해졌다.
"다 먹었어? 다 먹었으면 빨리 집에 들어가 있어. 엄마 곧 갈게."
정희는 빈 그릇을 치우며 작은 목소리로 아이를 채근했다. 진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와 같이 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너무 바빠 보였다. 진영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포장마차를 나섰다.
정희는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쫓아나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불 위에서는 안주가 타고 있었다. 정희는 다시 연탄 불 앞으로 돌아와 석쇠를 뒤집었다. 매캐한 연기가 정희의 얼굴을 덮쳤다.
치익. 치익.
한 방울, 또 한 방울.
물방울이 벌건 연탄 불 위로 떨어질 때마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희는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묵묵히 꼼장어를 구웠다.
매캐한 연기 속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삼키는 울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어둡고 멀었다.
국수 한 그릇으로 배는 채웠지만, 마음은 더 시렸다.
진영은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피해 터덜터덜 걸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춰주고 있었다.
끼익.
녹슨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진영이 들어왔다.
단칸방 옆 주인집 안방. 칠성댁은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흑... 흐윽...."
마당에서 어린아이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 어미 일하는 곳까지 갔다 왔는지, 발소리가 무겁고 질척였다. 칠성댁은 모로 누운 채 혀를 찼다.
"쯧쯧... 저 어린 것이 무슨 죄라고."
어미는 먹고살겠다고 빗속에서 불과 씨름하고, 애비 없는 자식은 밤길을 헤매다 들어왔다. 그 사정이 빤히 보여 가슴이 아렸다. 진영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칠성댁은 숨죽여 기다렸다. 빗소리가 밤새도록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