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아침이 되자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처마 끝에서 똑, 똑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 진영은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둑했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베개에 흩어져 있었고, 고단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진영은 엄마가 깰까 봐 숨을 죽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팠다. 어제 포장마차에서 급하게 먹은 국수는 이미 소화된 지 오래였다. 부엌으로 가보았지만 찬장에는 식은 밥 한 덩이 조차 없었다.
오늘 아침은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이었다.
진영은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코끝을 차갑게 스쳤다. 마당 수돗가에는 빗물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장독대 위에는 빗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야야, 꼬맹아!"
주인집 안방 쪽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성댁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대청마루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은 쟁반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 밥은 먹었어?"
진영은 쭈뼛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차더니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이거라도 하나 먹어라.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지."
진영은 쭈뼛쭈뼛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쟁반 위에는 껍질이 터실터실하게 일어난 찐 감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구수한 흙내음과 달큰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자, 먹어."
할머니는 주먹만 한 감자 하나를 집어 진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아 뜨거!"
진영이 감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할머니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뜨거워야 맛있지, 식으면 무슨 맛으로 먹어. 호호 불어가며 먹어."
진영은 감자를 반으로 쪼개 입에 넣었다. 포실포실한 감자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약간 짭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빈 속을 따스하게 채워주었다.
"어제는 무슨 청승을 그렇게 떨던?"
할머니가 무심한 듯 툭 던졌다.
"네?"
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밤새 훌쩍거리는 소리에 내가 잠을 다 설쳤다, 이놈아. 사내자식이 씩씩하게 있어야지, 그렇게 울면 쓰니."
할머니의 타박에 진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다 들었구나.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네 엄마가 고생이 많다. 비 오는 날 그렇게 장사해서 너 먹여 살리는 거 아니냐. 네가 엄마 속 썩이지 말고 잘해야 해."
할머니의 말은 투박했지만, 그 속에 담긴 온기는 손에 쥔 감자만큼이나 따뜻했다.
진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를 오물거렸다.
"하나 더 먹을래?"
어느새 감자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진영을 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네."
"그래,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할머니는 제일 큰 감자를 골라 진영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잠시 주춤하더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봐라."
잠시 후, 할머니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 몇 권을 들고 나왔다. 누렇게바랜 종이 냄새가 훅 풍겼다.
"이게 우리 집 손주놈들이 어릴 적에 보던 건데... 버리려다가 놔둔 거야."
할머니가 툭 던지듯 쟁반 옆에 책을 내려놓았다.
다큐멘터리 자연의 신비, 재미있는 수학 만화, 그리고 낡은 셜록 홈즈 전집 중 몇 권이었다.
진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실 진영은 읽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책을 사달라는 말은 언감생심이었다. 집에 있는 것이라곤 학교에서 받아온 교과서뿐이었다. 진영은 심심할 때마다 국어책과 도덕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곤 했었다.
"너 저번에 마루에 쭈구리고 앉아서 교과서 읽대? 교과서가 재밌어?"
할머니가 감자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진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혼자 교과서를 읽는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다.
"많이 봐서 재미는 없는데... 책이 없어서요."
할머니는 진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낮에 가끔 마루에 나와 앉아 있으면, 학교 다녀온 진영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교과서를 읽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공부 욕심이 많은 아이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글 읽는 소리가 막힘이 없었다. 모르는 글자가 나와도 어물쩍 넘어가는 법이 없이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다.
'요놈 봐라.'
할머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열심인 꼴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짠했다. 볼 책 한 권 없이 교과서만 파고 있는 꼴이라니.
"가져가서 읽어 봐라. 다 읽으면 또 줄 테니까."
"정말요? 정말 가져가도 돼요?"
"그럼, 묵혀서 뭐 하겠니. 책은 읽으라고 있는 거지. 책을 많이 읽어야 돼. "
진영은 감자를 입에 문 채 책을 품에 꼭 안았다.
자연의 신비 책은 표지 속의 사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고, 셜록 홈즈의 탐정 그림이 자신을 모험의 세계로 초대하는 듯했다.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던 시간들이 이제는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기다려질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영이 배꼽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가서 마저 먹어."
할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비 냄새와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연기 너머로, 진영은 처음으로 이 셋방살이 집이 춥지 않다고 느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감자의 달콤함과 품에 안긴 책의 무게가, 지난밤의 서러움을 따스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며칠 뒤, 비가 갠 화창한 오후였다.
정희가 수돗가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안방에서 할머니가 불렀다.
"새댁, 잠깐 이리 좀 들어와 봐."
정희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혹시 월세를 올려달라는 말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할머니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듯한 낡은 앨범을 넘기고 있었다.
"앉아봐."
정희가 무릎을 꿇고 앉자, 할머니는 돋보기를 고쳐 쓰며 말했다.
"니 아들, 진영이 말이다.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네? 진영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정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사고가 아니라 머리 말이야. 내가 준 책을 벌써 다 읽었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놈이야."
할머니는 앨범 속의 낡은 흑백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아들놈들이야. 지금은 번듯하게 살지만, 나도 이놈들 키울 때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어. 남편 일찍 보내고 혼자서 안 해본 고생이 없어."
할머니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그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가 못 먹고 못 입어도 딱 하나 포기 안 한 게 있어. 바로 자식 놈들 공부야. 내가 무식해서 당한 설움이 오죽했겠어? 그래서 내 자식들은 기필코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지. 결국 사람 구실 하게 만든 건 밥이 아니라 책이더라는거야."
정희는 고개를 숙이고 듣기만 했다. 먹고살기 바빠 아들에게 동화책 한 권 사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는 게 힘들어서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거 알아. 하지만 진영이 저 놈, 그냥 두면 아깝다. 싹수가 보이는 놈은 물을 줘야 크는 법이야."
할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무심한 듯 툭 내뱉었다.
"방세. 당분간 안 올릴 테니 그리 알아."
"네? 정말이세요?"
정희가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요즘 주변 전세며 월세가 다 오르는 추세라 내심 걱정하던 참이었다.
"대신 그 돈 모아서 딴 데 쓰지 말고, 진영이 책 사주고 학용품 사줘. 애가 보고 싶다는 책 있으면 아끼지 말고 사주란 말이야."
"할머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아직 젊잖아. 평생 혼자서 애만 바라보고 살 거야? 좋은 사람 있으면 재혼이라도 해. 여자 혼자 몸으로 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저는 진영이만 잘 크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정희가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는 단호했다.
"애가 힘들어. 너도 힘들지만, 애는 더 힘들어. 살면서 다 가질 수는 없더라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채우면서 살아."
정희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벗어 놓고 담배를 물었다.
"나가 봐. 빨래 다 마르겠다."
정희는 안방을 나오며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마루 끝에 앉아 담배 연기를 내뿜는 할머니의 등 뒤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쳤다. 무뚝뚝한 말투 속에 숨겨진 투박한 진심이,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정희의 언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