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요새

by 돌부처

북방의 매서운 삭풍이 두꺼운 갑옷 틈새를 후벼팠다. 일반 필부라면 살갗이 얼어터질 악재에도 사내의 걸음은 멎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체온은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허리춤에 결박된 시퍼런 쇳덩이가 음습한 열기를 규칙적으로 뱉어내는 까닭이었다.


겐지는 걸음을 멈췄다.


눈구덩이 너머로 거대한 성벽의 그림자가 덮쳐왔다. 조선 최전방의 숨통을 지키던 북방 요새의 잔해였다. 수비병 교대 깃발 하나 펄럭이지 않는 거대한 묘비. 빈 망루의 주인은 눈알이 파먹힌 까마귀 떼였다. 미물들은 성벽 위에 도열해 침묵 속에서 사방으로 번지는 고기 썩는 점액질의 부패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덜그럭.


칼자루를 쥔 손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건만, 짐승의 뼈로 세공된 칼집 안쪽에서 시퍼런 칼날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지독한 허기를 호소하는 포식자의 생떼였다.


"죽여버리기 전에 닥쳐라."


겐지의 메마른 입술 틈새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조선의 언어 체계는 여전히 겉돌았지만, 허리춤에 매달린 굶주린 금속에게 협박을 전하는 요령만큼은 본능의 영역이었다.


요도(妖刀) 무라마사(村正).


타인의 따뜻한 선혈로 목을 축이지 못한 날에는 기어이 제 주인의 피와 골수를 파먹고야 마는 기생(寄生)의 무구였다. 겐지는 부서진 성문을 향해 무거운 갑옷 자락을 이끌었다. 무릎 높이의 폭설이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의 발자국은 육 척 장신의 무게를 기만하듯 얕고 흐릿하게 눈송이를 스쳤다. 살기를 감추는 야행성 고양이의 보법이었다.


성문은 박살 나 있었다. 문짝 파편의 궤적은 기형적이었다. 요새 내부의 기생체가 육중한 참나무 문짝을 안에서 밖으로 강제 개방하며 산산조각 낸 이탈의 흔적이었다.


겐지는 성의 내부로 진입했다.

지독한 적막 상태.


사각지대에는 정적만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겐지의 훈련된 후각은 이 극저온의 공기 바닥에 엉겨 붙은 질척한 악취를 명확하게 분리해냈다. 상처가 곪아 터져 흘러내린 황색 고름의 비릿함이었다.


그 찰나였다.

반파된 병영막사 그림자 구석에서 불규칙한 미동이 일었다.


서걱.


연골 없는 뼈마디가 강제로 마찰하는 기괴한 파음. 겐지는 보폭을 줄이지 않았다. 검지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전방을 응시했다. 그림자의 장막을 찢고 불쑥 튀어나온 형체는 군관(軍官)이었다. 지푸라기가 엉겨 붙은 조선 수군 군복. 부서진 투구 아래에는 온전한 살점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뻥 뚫린 두 눈구멍과 콧대가 주저앉은 뼈의 틈새로 희멀건 구더기 떼가 득실거리며 꿈틀거렸다.


"끄어어..."


시체가 녹슨 환도를 반경 없이 휘둘렀다. 하품이 나올 만큼 조잡하고 둔탁한 궤적이었다. 겐지는 피행(避行) 대신 정면 돌파를 택했다.


캉!


무딘 환도 날이 겐지의 어깨 견갑을 타격하고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허공으로 탁한 불꽃이 튀며 사그라졌다. 겐지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정체불명의 시체 덩어리를 곁눈질했다. 그는 곰 같은 악력으로 군관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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