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기록
“이제, 마지막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선우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으나, 그것은 법정에서 낭독되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그가 병실 문턱을 넘는 순간,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질렀다. 벽에 그려진 귀여운 토끼와 곰, 강아지들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역청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꾸며졌던 벽화는 순식간에 울부짖는 악몽의 풍경으로 바뀌었고, 병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짙은 절망의 서리가 퍼져 나와, 방 안에 간신히 남아있던 따뜻한 온기를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작은 성역(聖域)이던 병실이, 그의 존재만으로 차갑고 끈적한 절망의 왕국으로 빠르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멈출 수 없는 파멸처럼 단호했다. 목표는 상처 입은 지운도, 마지막 기력까지 짜내고 있는 서화도 아니었다. 그의 얼음 같은 시선은 오직 병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인큐베이터, 그 마지막 희망의 불씨에 박혀 있었다.
“거기만은… 건드릴 수 없어!”
서화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 병원의 모든 절망을 뒤덮은 그의 완벽한 왕국에 남은 단 하나의 이물(異物). 자신의 절대적인 지배를 부정하는 ‘희망’의 잔재. 이선우는 그것을 없애려 했다. 자신의 완벽한 그림에 튄, 용서할 수 없는 오점을 지워버리려는 듯.
“안 돼!”
서화가 휘청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손에는 깨진 옥경의 날카로운 조각이 들려 있었다. 조각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에 호응하듯 희미한 빛을 흘리며 그녀의 의지를 대신했다. 그러나 이선우는 벌레를 보는 듯한, 지독한 경멸과 가엾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환자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저항은… 병세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스치는 것이 아니었다. 강철 같은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검은 불길 같은 연기가 터져 나오며 서화의 피부를 태웠다. 그 연기는 단순한 화상이 아니었다. 생명력 자체를 빨아먹는 공허의 구멍이었다. 그녀의 하얀 팔에서부터 핏기가 사라지고, 마른 땅처럼 회색으로 갈라지며 생기가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얌전히 계시면, 고통은 금방 사라질 겁니다. 영원히.”
서화의 입술에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버티려 했지만, 영혼까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다리가 풀리며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운은 그 모든 걸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천근만근 납처럼 무거웠고, 텅 빈 껍데기처럼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기록을 강제로 각성시켰던 끔찍한 대가. 그는 지금 살아있는 돌조각처럼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이 무력감 속에서 모든 것이... 절망이 그의 심장을 완전히 짓눌러, 마지막 숨마저 앗아가려던 바로 그때,
...쿵...
아주 희미한 고동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생명의 진동이었다. 그리고 그 진동은 곧, 칠흑 같은 절망을 가르는 한 줄기 빛처럼 맑고 청아한 아기 울음소리로 변했다.
응애-
환청이 아니었다. 인큐베이터에 깃든, 이 지옥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록’이 그를, 기록자의 피를 부르고 있었다. 죽은 듯 잠자고 있던 그의 피가 그 순수한 부름에, 마치 주인을 만난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며 온몸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지운의 손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련하듯 떨리며 인큐베이터를 향해 뻗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는 것처럼. 사인검의 화상 자국이 남은 손바닥이 차갑고 먼지 쌓인 유리에 닿았다.
그 순간-
화아악-!
붉게 달궈진 화상 흔적에서 폭발적인 빛이 번져 나왔다. 그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무시하고 수십 년 전, 이 병원이 지옥으로 변하던 그날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복도를 흥건히 적신 피, 차갑게 굳어가는 시체들의 마지막 절규. 죽음과 부패, 약품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 모든 절망과 죽음의 교향곡 속에서, 모든 것을 뚫고, 모든 것을 잠재우며 터져 나온 단 하나의 소리.
-응애!
어미도, 의사도 없이,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 스스로의 힘으로 터뜨린 첫 울음. 살아남겠다는 본능적인 외침. 가장 원초적이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생명’의 기록. 지운은 마치 자신이 그 아이가 된 것처럼, 벅차오르는 첫 숨을 떨리는 가슴으로 내쉬었다.
“이것이… 당신을 이길 유일한 무기다.”
지운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온, 기록자들의 목소리가 그의 입을 빌려 선언하는 듯했다.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라는 관념이 아니었다. 죽음의 반대는,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인큐베이터를 부서질 듯 두 팔로 끌어안았다. 자신의 남은 피와 영혼, 그리고 기록의 강에서 스쳐 지나간 수억 개의 기억까지 모두 제물로 바쳐, 잠들어 있던 기록을 억지로 깨웠다.
“일어나… 울어라! 이 세상에 너의 존재를 증명해라! 울어라!”
화아아아아아아—!
인큐베이터에서 눈부신 은백색 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황금빛의 장엄함도, 신비한 청록의 빛도 아니었다. 그저 순결하고 순수한,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생명의 빛, 존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창조의 빛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빛의 파동이 되어 병실 전체를, 병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이선우의 비명은 단순한 절규가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며 찢어지는 단말마였다. 그가 쥐고 있던 서화의 손목에서 검은 손가락이 녹아내리는 것을 넘어, 그의 팔 전체가 검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순수한 생명의 빛은 절망으로 이루어진 그의 살점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가운은 갈라졌고,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고통받는 얼굴들이 엉겨 붙어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원념의 탑이었다. 그 원념들이 빛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타들어가, 속박에서 풀려난 영혼들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이...이런...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그는 이 병원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신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름 없는 아기의 울음 하나에 그의 왕국이, 그의 존재가 흔들리고 있었다. 빛은 병실을 넘어 복도로, 계단으로, 지하 깊은 수술실까지 해일처럼 번져나갔다. 벽을 기어 다니던 검은 손들이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복도를 배회하던 환자복 차림의 원혼들이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어 흰 연기처럼 흩어졌다. 절망으로 얼어붙었던 병원이, 하나의 생명이 터뜨린 울음에 무너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건건물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천장과 벽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며 먼지와 콘크리트 조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바닥이 기울고, 발 디딜 곳조차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지금이에요!”
서화가 쏟아지는 잔해 속에서 먼지를 토해내며 외쳤다. 무너지는 벽의 틈새로, 합판으로 막혀 있던 창문 너머로 진짜 새벽빛이 칼날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저 빛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줄 거예요!”
지운은 인큐베이터에서 손을 떼며, 빠르게 붕괴하는 병실을 둘러보았다. 몸은 완전히 탈진했지만, 죽음의 공포가 그의 정신을 이상할 정도로 맑게 만들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서화를 부축해, 유일한 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서, 이제는 형체조차 무너져 내리는 이선우의 마지막 저주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울렸다.
“기억해라… 기록자...”
“희망은… 언제나 더 큰 절망을 부르는 법이지… 너는… 씨앗이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검은 연기와 함께 찢겨 나가며 사라졌다. 두 사람은 깨진 창문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3층 높이에서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몸이 내던져지는 순간, 지운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 찰나, 등 뒤에서, 병실의 인큐베이터에서 터져 나왔던 은백색 생명의 빛이 마지막 힘을 다해 한번 더 폭발했다.
쿠와아아아앙!
그것은 파괴의 충격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밀어내는 부드럽고 강력한 생명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이 추락하던 두 사람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낙하의 속도를 죽이고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동시에 병원 건물은 바깥으로 폭발하는 대신, 마치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붉은 벽돌과 철근, 수십 년 묵은 절망의 기운이 뒤엉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수십 년간 이 땅을 옥죄던 거대한 늪. 그 첫 번째 절망이, 마침내 스스로를 삼키며 무너져 내렸다.
밖은 새벽이었다. 동녘에서 서서히 해가 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흙바닥 위에 쓰러진 지운과 서화는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화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살아남았군요.”
지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맺혀 있었다. 무너진 병원 자리에,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검은 그림자들이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며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새벽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아직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삶은 죽음을 밀어냈지만, 죽음 또한 끝까지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