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왕
또각. 또각.
발소리는 이글거리는 불길의 소음과 쇠가 녹아내리는 굉음 속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고급 가죽 구두가 타일 바닥을 밟는 소리. 서두르지 않는, 느긋하고 위압적인 걸음걸이. 마치 자신의 왕국을 순찰하는 왕처럼, 혹은 회진을 도는 의사처럼. 그 소리에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지운과 서화는 통로 안쪽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살갗을 태울 듯한 열풍이 채 가시지 않은 통로 입구. 그 불길의 아지랑이 너머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는 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화염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를 경외하듯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그의 옷자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 그을리지 않았다. 그는 불길의 주인이었다.
남자는 50대쯤으로 보였다.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금테 안경 너머의 눈은 차갑고 지적이었다. 그는 낡고 해진 의사 가운이 아닌, 방금 다림질한 듯한 흠잡을 데 없이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슴팍의 명찰에는, 유려한 필체의 이름이 선명했다.
[원장 : 이선우]
그가, 이 늪의 중심. 이 병원의 왕이었다.
“소독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지요.”
이선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교양 있는 학자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인 온기가 전혀 없었다. 그는 불타버린 보일러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신의 충직한 부하가 한 줌의 재로 변한 자리.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분노 대신, 아끼던 실험 도구가 망가진 것을 보는 듯한, 귀찮다는 표정만이 스쳐 지나갔다.
“쓸 만한 인형이었는데… 아쉽군요.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그의 시선이, 마침내 두 사람이 숨은 통로 입구로 향했다. 짙은 어둠 속에 있었지만, 그는 정확히 그들의 심장박동과 공포를 ‘보고’ 있었다.
“손님들이 오셨나요.”
그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친절이 아닌, 해부대 위의 생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냉정한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이런, 이런. 보다시피, 우리 병원은 지금 만원이라… 더 이상 새로운 환자를 받을 병상이 없는데 어쩌죠.”
그는 천천히 통로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올수록, 지운은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의 눈에, 이선우의 형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가, 이 병원 전체에서 수십 년간 흘러나온 검붉은 원념과 절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응집체였다. 그의 심장부에서는, 모든 빛과 희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어둠이 고동치고 있었다.
“지박령(地縛靈)….”
서화가 옆에서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공포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원혼이 아닙니다. 이 병원이라는 땅 자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키고 신(神) 행세를 하는, 가장 흉악한 존재예요.”
“훌륭하군요.”
이선우가 박수를 쳤다. 그 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내 소개를 대신해주시다니요. 그래요, 나는 이곳의 왕이자, 신이며, 유일한 의사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의 새로운 환자들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 주변 공기가 변했다. 불타는 보일러실의 열기는 간데없고, 다시 차갑고 서늘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지운의 눈앞에, 강력한 환각이 펼쳐졌다. 어둡고 좁은 통로가,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병원 복도로 변했다. 양옆으로는 수많은 병실 문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이곳에서 죽어간 환자들의 원망과 고통, 그리고 희미한 기대를 품은 눈들이었다.
“살려줘….”
“아파… 너무 아파….”
“의사 선생님… 제발….”
수백 개의 목소리가, 그들의 뇌 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절망과 고통의 합창.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 환각에 그대로 영혼까지 잠식당할 터였다.
“여기는 나의 왕국입니다.”
이선우의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렸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죽지 않지요. 그저… 영원히 치료받을 뿐이죠.”
그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들도 나의 환자가 되세요. 내가 모든 고통을… 영원히 보살펴 드리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 영원한 안식에 맡기고 싶은 끔찍한 충동. 지운의 의식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화악-
지운의 손등, 사인검이 남긴 화상 자국이 불에 덴 듯 뜨겁게 타올랐다. 순수한 양기(陽氣)의 고통이, 그의 정신을 후려쳤다.
“으윽!”
지운은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하얀 복도는 사라지고, 다시 어둡고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선우는, 어느새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부하시는가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죠."
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지운의 이마를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서화가 움직였다. 그녀는 지운을 뒤로 밀치고, 품에서 마지막 남은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피로 그린,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그녀의 모든 기운이 담긴 부적이었다.
“여기는 너의 왕국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부적을 이선우의 이마에 붙였다.
치이이이이이이익-!
부적이 타오르며, 이선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
이선우가 처음으로, 인간적인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텅 빈 눈이, 서화를 향했다.
“그 절망… 그 고통… 그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희망. 아주 맛이 좋군요.”
부적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선우의 몸을 휘감던 검붉은 기운이, 이전보다 더욱 거대하고 사악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서화의 공격은, 그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한 힘을 부여한 것이다. 이선우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서화의 목을 향해.
“이제,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선우의 손이 서화의 목을 향해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기운. 저것에 닿는 순간, 서화의 영혼마저 잠식당할 터였다. 지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탈진한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공포가 다시 심장을 옭아맸다. 이대로 끝인가.
‘기록자의 힘은… 당신의 존재 자체가 등불이 된 겁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등불. 그래, 등불. 어둠을 밝히는 빛. 지운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의식을, ‘기록자’의 감각에 집중했다.
보였다. 이선우라는 거대한 절망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검붉은 빛.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 병원 전체에 스며든 수백 개의 희미한 잿빛들. 모두 고통과 원한의 색이었다. 하지만. 있다. 이 거대한 절망의 늪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빛을 내는 곳. 아주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작은 불씨. 따뜻하고, 순수한 은백색의 빛. 그것은 이 통로의 위, 병원의 상층부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
희망.
“서화 씨!”
지운이 외쳤다.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벽돌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통로 반대편, 깊은 어둠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던졌다.
쨍그랑-!
벽돌이 어딘가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선우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그 찰나의 틈.
“위로! 위로 가야 합니다!”
지운은 비틀거리는 서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통로를 빠져나와, 불타는 보일러실을 가로질러 복도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이선우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자신의 왕국 안에서, 쥐새끼들이 어디로 도망치든 상관없다는 오만함. 그는 그저 즐기고 있었다.
“지운 씨… 대체….”
“설명은 나중에! 일단 뛰어요!”
두 사람은 잿가루와 먼지로 뒤덮인 복도를 달렸다. 벽지는 썩어 문드러졌고, 천장에서는 시커먼 물이 뚝뚝 떨어졌다. 복도 양옆의 병실 문들이,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마치 두 사람을 유혹하는 것처럼. 그들은 중앙 계단을 향해 달렸다. 계단은 곰팡이와 녹으로 뒤덮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병원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선우가, 자신의 왕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환각은 더욱 심해졌다. 벽면에서 수십 개의 손이 튀어나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바닥은 질척한 늪으로 변해, 한 걸음 내딛기가 천근만근이었다. 귓가에서는 죽은 환자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아파… 아파요….”
“엄마… 보고 싶어….”
서화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허벅지를 깨진 옥경 조각으로 찔렀다. 고통으로, 환각을 이겨내고 있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지운이 외쳤다. 그의 눈에는, 점점 더 선명해지는 은백색의 빛이 보였다. 마지막 층. 소아과 병동이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계단을 뛰어 올라, 복도 끝에 있는 한 병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문을 부수고 안으로 굴러 들어간 순간, 등 뒤에서 쫓아오던 모든 환각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곳은, 다른 공간이었다. 병원 전체를 뒤덮은 죽음의 기운이, 이 방만은 침범하지 못한 듯했다. 벽지는 빛이 바랬지만, 귀여운 동물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먼지 쌓인 창문으로는, 새벽빛이 따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지운이 보았던 은백색 빛의 근원. 낡고 녹슨, 오래된 인큐베이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색이 바랜 아기 담요 한 장만이 개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운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깃든 ‘기록’을. 수십 년 전, 이 절망의 병원에서. 기적처럼, 유일하게 살아남아 태어났던 한 생명.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죽어가는 지옥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첫 울음을 터뜨렸던 아이. 이 병원의 유일한 희망. 가장 순수한 생명의 기록이었다.
또각.
그때, 병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이선우가, 어느새 그곳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는 문지방에 서서, 방 안의 인큐베이터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희망이라.”
그의 목소리에는 조롱과 함께, 아주 희미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나의 왕국에, 아직 이런 것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저도 몰랐군요...하지만 어쩌나.”
그가 미소 지었다.
“나는… 절망을 먹고 사는 의사인데요."
그는 천천히, 병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따스한 온기가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벽에 그려진 동물 그림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마지막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