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院長)의 기록
간호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이 창문에 박혀 있는 것처럼. 꺾인 목, 초점 없는 눈동자, 미동도 없는 자세. 그녀는 단순한 원혼이 아니었다. 저 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체의 일부, 혹은 그 늪에 피어난 독버섯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지운의 눈에는, 이제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는, 차갑고 끈적한 잿빛의 아지랑이. 죽음의 색. 그 안에는 살아있는 자의 감정이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그저 텅 빈 공허. 그것은 그저 움직이는 시체,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였다.
“초대일까요.”
지운이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이제 두려움보다 차가운 분석이 담겨 있었다.
“아니면, 경고인가요.”
“둘 다겠죠.”
서화의 시선은 3층 창문이 아닌, 굳게 닫힌 병원 정문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들어오되, 살아 나갈 생각은 말라는 뜻입니다. 저 문은 이미 죽은 자들의 것입니다.”
정문은 육중한 쇠사슬과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굳게 닫힌 문. 지운의 눈에는 쇠사슬 위로 검은 원념이 뱀처럼 휘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서화는 처음부터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병원 건물을 끼고, 잡초가 무성한 옆 골목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지운이 그 뒤를 따랐다.
골목은 쓰레기와 의료 폐기물로 보이는 것들이 뒤섞여 역한 냄새를 풍겼다. 그 끝에는, 병원의 후문인 듯한 작은 철문이 있었다. 그곳 역시 굵은 쇠사슬로 감겨 있었다. 하지만 서화는 문이 아닌, 그 옆의 붉은 벽돌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벽을 쓸자, 두껍게 낀 이끼와 먼지 아래 숨겨져 있던 희미한 문양이 드러났다. 그녀가 인사동 필방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팔에 새겨진 붉은 용의 문신과 같은 문양이었다.
“모든 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습니다. 파수꾼은 그 틈을 여는 자들이죠.”
그녀는 문양의 중심, 용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자신의 기운을 흘려 넣는 듯했다.
드르륵.
벽돌 몇 개가 소리 없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어두운 구멍이 나타났다. 파수꾼들만이 아는, 오래된 길이었다.
“들어가요. 지금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쪽은 병원의 보일러실인 듯했다. 거대한 구식 보일러와 녹슨 배관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내장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눅눅한 곰팡내와 함께, 코를 찌르는 희미한 약품 냄새가 섞여 있었다. 포르말린. 시체를 보존하는 데 쓰이는, 죽음의 냄새였다. 그때였다. 지운의 눈에, 보일러실 구석에 산처럼 쌓인 의료 폐기물 더미가 들어왔다. 그 위로,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짙고 검붉은 ‘기록’의 색이 역병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과 원한, 그리고 뒤틀린 집착의 색이었다.
“저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화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폐기물 더미 위에는, 낡고 해진 의사 가운 하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가슴팍의 낡은 명찰에는 빛바랜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원장 : 이선우]
“이 병원의 원장이었군요.”
“네. 그리고 이 ‘늪’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병원은 수십 년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폐쇄되었습니다. 의사와 환자, 수십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했죠.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이선우 원장이 있었습니다.”
지운은 명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피가, ‘기록’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알아야만 했다. 눈을 감자, 수십 년 전의 풍경이 그의 머릿속으로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비명. 절규. 복도를 가득 채운 피와 고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환자들의 목소리. 공포에 질려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의사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굳게 닫힌 원장실에서 홀로 지켜보던 한 남자.
이선우.
그는 처음에는 구원을 바랐다. 신에게, 하늘에,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하늘은 답하지 않았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다른 것에 손을 내밀었다. 인간이 아닌, 더 오래되고 사악하며 이름 없는 존재에게. 자신의 영혼과, 이 병원에 남은 모든 영혼을 대가로, 이 병원을 자신만의 왕국,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으윽…!”
지운은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너무나도 강렬하고 악의에 찬 기록. 그의 정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절망이었다.
“괜찮아요?”
서화가 그를 부축했다.
“너무 깊게 보지 마세요. 기록에 잠식당합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끼익.
보일러실과 병원 복도를 잇는, 낡은 철문이 저절로, 아주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 복도 저편 어둠 속에서.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화는 지운을 부축해, 거대한 보일러 뒤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하이힐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마침내, 보일러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고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그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지운은 참지 못하고, 보일러의 녹슨 틈새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인가. 그때,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문 앞에, 낡고 해진 간호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신발 앞쪽으로. 바닥을 따라, 축축하고 검붉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마치 투명한 무언가가, 맨발로 피 위를 걸어온 것처럼.
끼이이익…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녹슨 바퀴가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소리. 어둠 속에서, 낡은 이동식 침대 하나가 스스로 움직여 보일러실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밀고 있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숨은 보일러 앞에 멈춰 섰다.
또르르…
침대 위에서, 무언가 작고 단단한 것이 굴러떨어졌다. 갈색 유리 앰플. 그리고 그 옆으로, 녹슨 주삿바늘이 섬뜩한 빛을 반사했다.
“환자분….”
목소리가 들렸다. 지운의 뇌리에 직접 울리는, 감정 없는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
“진료 시간이에요….”
침대 위에서, 무언가 작고 단단한 것이 굴러떨어졌다. 갈색 유리 앰플. 그리고 그 옆으로, 녹슨 주사바늘이 희미한 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것들은 수십 년간 죽음과 함께해 온, 차갑고 무감정한 도구들이었다.
그 순간 지운은 깨달았다. 저것은 분노나 원한으로 그들을 사냥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수십 년 전, 자신이 죽던 그 순간까지 반복했던 일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 다만 그 대상이 산 자이고, 그 치료의 끝이 죽음일 뿐. 그 뒤틀린 일상성(日常性)이 지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차갑고 거대한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거대한 보일러였다. 막다른 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마셨다. 그 작은 소리가, 어둠 속에서는 천둥처럼 울렸다.
“찾았다.”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마치 연인의 속삭임처럼 다정하게,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울렸다. 동시에, 지운의 눈앞 허공에서 녹슨 주사바늘이 나타나 그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시간 감각이 늘어나는 듯했다. 검붉은 액체를 머금은 바늘 끝이, 자신의 경동맥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과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의 궤적.
“안돼!”
그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찰나, 서화가 움직였다. 그녀는 바닥의 검고 기름진 먼지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포르말린 냄새와 죽음의 잔해가 뒤섞인 공기. 그리고 허공을 향해, 그것을 폭발시키듯 뿌렸다.
촤아악-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것의 윤곽이 먼지 사이로 드러났다. 간호사였다. 오래전의, 낡고 해진 간호복.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없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밋밋한 평면일 뿐이었다. 오직 슬픔으로 가득 찬, 텅 빈 눈구멍 두 개만이 뚫려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주사기에는, 검붉은 피 같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키에엑!
모습이 드러나자,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사기를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서화는 몸을 날려 지운을 밀쳐내고, 품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거울로 간호사를 비추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간호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수꾼의 도구. 사악한 것을 비추어, 그 본질을 태우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텅 빈 눈은,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운이 아니었다. 보일러실 구석, 낡은 의사 가운이 놓인 곳.
“원장님….”
간호사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울려 퍼졌다.
“제가…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 순간, 지운은 깨달았다. 이 원혼의 집착. 그것은 이선우 원장을 향한 것이었다. 죽어서도, 그의 곁을 지키려는 맹목적인 충성.
“서화 씨! 저 가운!”
지운이 외쳤다.
“저것을 없애야 합니다!”
서화는 그의 의도를 즉시 알아차렸다. 그녀는 거울로 간호사를 견제하며, 지운에게 소리쳤다.
“방법을 찾아요! 저는 시간을 벌겠습니다!”
지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을 붙일 만한 것. 하지만 이 축축한 보일러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녹슨 배관들 사이로 이어지는 낡은 밸브에 닿았다. 오래된 도시가스 배관. 폐쇄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만약. 그는 밸브를 향해 달려갔다. 간호사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서화의 거울에 가로막혀 접근하지 못했다. 지운은 온 힘을 다해, 녹슨 밸브를 돌렸다.
끼이이이이이익-
오래된 쇠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쉬이이이이익-
미세하게, 가스가 새어 나오는 소리. 아직 살아있는 배관이었다.
“서화 씨! 저 가운 쪽으로 유인해요!”
지운이 소리쳤다. 그는 가스 냄새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벽에 붙어있는 낡은 전기 차단기를 발견했다. 뚜껑은 부서져 있었고, 안에는 낡은 전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저 구멍으로 피해요! 최대한 빨리!”
그가 들어왔던 벽의 비밀 통로를 가리켰다. 서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간호사의 집착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거울을 든 채, 의사 가운이 있는 폐기물 더미 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원장님이… 위험해.”
서화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말에, 간호사가 맹렬하게 반응했다.
키에에엑!
간호사는 지운을 버리고, 오직 서화와 그녀가 다가서는 가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사이 지운은 바닥에 나뒹구는 긴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는 파이프의 한쪽 끝을, 피복이 벗겨진 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다른 쪽 끝은, 가스가 퍼져나가는 보일러실 중앙을 향하게 했다.
“지금!”
지운이 마지막 남은 공기를 토해내듯 외쳤다. 서화는 간호사의 손톱이 자신의 등을 할퀴기 직전, 몸을 날려 비밀 통로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간호사는 마침내 자신의 주군, 원장의 유품을 지켰다는 듯, 낡은 가운이 놓인 폐기물 더미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지운은 통로 입구에 엎드린 채, 떨리는 손으로 쇠 파이프를 밀어 두 전선을 합선시켰다.
파지지직-!
눈앞이 멀어질 듯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죽어있던 공간에 억지로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폭력적인 빛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불꽃은, 공기 중에 가득 찬 도시가스를 따라 보이지 않는 도화선 위를 달리는 푸른 뱀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륵-!
폭발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는 연쇄적인 연소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보일러실 중앙으로 번져나가며 거대한 화염 방사기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쇠가 녹는 소리,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뒤섞였다.
“아...안돼에에에에에-!”
의사 가운을 끌어안은 간호사의 마지막 비명이, 불길 속에서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형체는 뒤틀린 충성과 함께, 원장의 가운과 함께, 한 줌의 검고 기름진 재로 변해갔다. 살갗을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열풍이 통로 안까지 덮쳐왔다. 지운은 마지막 힘을 다해 통로 안으로 몸을 굴렸고, 먼저 피신해 있던 서화가 그의 팔을 잡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보일러실은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거대한 불지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불길 너머 열린 철문 밖 복도에서는 지운과 서화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또각. 또각.
새로운 발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