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씨앗
의식이 없었다.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한지운은 거대한 빛의 강물에 휩쓸리는 한 점의 먼지였다. 수만, 수억 개의 ‘기록’들이 빛나는 혜성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 대장장이의 뜨거운 망치질 소리와 땀 냄새. 달빛 아래 연인을 그리며 써 내려간 궁녀의 애끓는 연서(戀書). 진흙탕을 내달리는 전쟁터의 말발굽 소리와 단말마의 비명.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터뜨리는 이름 모를 아이의 첫울음. 모든 기억, 모든 감정이 그의 정신을 남김없이 꿰뚫고 지나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아득히 초월한, 영겁과도 같은 시간. 그의 자아는 수억 개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다시 뭉쳐지기를 반복했다.
‘…더 큰 절망의 씨앗이 되어라.’
화천회 노인의 저주 섞인 예언이, 그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꺼지지 않는 등대처럼, 혹은 영혼에 새겨진 낙인처럼 선명하게 울렸다. 그의 자아는 거의 소멸 직전이었다. 모든 것이 빛과 소리의 홍수 속으로 녹아내리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쿵!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온몸이 내동댕이쳐졌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부서져 제자리를 이탈하는 듯한, 생생한 충격. 빛의 터널이,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 이물질을 뱉어내듯 그들을 현실 세계로 난폭하게 토해낸 것이다. 영겁의 시간에서 찰나의 현실로의 추락이었다.
“쿨럭, 쿨럭…! 컥!”
지운은 엎드린 채 땅바닥을 기며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던 빛의 잔해가 희미한 먼지처럼, 그리고 피 섞인 가래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헤엄치던 것이 단순한 빛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무언가였음을 깨달았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한 고통과 함께, 수억 개의 타인의 기억이 남긴 잔상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손에 굳게 쥐고 있던 황금빛 두루마리는, 어느새 한 줌의 재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흩어져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이다.
“정신 차려요, 한지운 씨.”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서화였다. 그녀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피투성이 옷은 너덜너덜했고,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여긴….”
지운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좁고 긴 인공 동굴 안에 있었다. 축축한 벽면에는 오래된 전선과 녹슨 수도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 쌓인 레일이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지하 벙커입니다.”
서화가 벽을 짚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용의 척추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길과 새로운 길을 모두 잇고 있죠. 이곳은 그 길의 끝 중 하나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동굴 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새벽빛을 향해 걸었다. 눅눅한 곰팡내와 녹슨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도시의 신비로움도, 기록의 탑의 장엄함도 없었다. 그저 차갑고 버려진,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공간이었다. 마침내 빛이 가까워졌다. 녹슨 철제 사다리가 위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은 굳게 닫힌 맨홀 뚜껑이었다. 지운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뚜껑을 밀어 올렸다.
끼이익-
오래된 쇠가 비명을 질렀다. 쏟아져 들어오는 회색빛 새벽빛에, 두 사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익숙한 매연 냄새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돌아온 것이다. 서울로.
그들이 기어 나온 곳은, 잡초가 무성한 어느 재개발 지역의 후미진 공원 구석이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주변 풍경을 유령처럼 지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머나먼 전쟁터에서 돌아온 패잔병처럼, 한동안 말없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막막함이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지운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낯설 정도로 쉬어 있었다.
“박물관은 난장판이 됐을 거고… 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서화가 잘라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난 깊은 상처를 찢어진 옷소매로 동여맸다.
“화천회는 우리를 쫓을 겁니다. 경찰 역시, 국립박물관 테러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우리를 찾겠죠.”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지운의 눈에는, 이전과 같은 혼란은 없었다. 그는 기록의 강을 건맜다. 수천 년의 기억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평범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지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각성시킨 힘이, 저주가 될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서화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록자의 힘은 양날의 검. 강한 빛은 더 짙은 어둠을 부릅니다. 당신은 이제 보통의 인간이 아니에요. 당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들을 끌어당기는 등불이 된 겁니다. 노인은 당신을 죽이는 대신, 더 큰 재앙을 불러올 ‘미끼’로 세상에 풀어준 겁니다.”
그 순간, 지운은 깨달았다. 노인이 마지막에 지었던 그 기묘한 미소의 의미를.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더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럼….”
“싸워야죠.”
서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길을 잃으셨으니, 제가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것이 파수꾼의 일이니까요.”
그녀는 품에서 작은 나침반을 꺼냈다. 광화문에서 보았던, 검은 거북이가 앉은 패철. 하지만 이전과는 모습이 달랐다. 미친 듯이 떨리며 방향을 잡지 못하던 거북이는, 이제 고요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향은, 동쪽이었다.
“이건….”
“의식은 멈췄지만, 균열은 남았습니다.”
서화가 패철의 검은 등껍질을 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웠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첫 번째 문은, 이 땅의 대문을 부순 것과 같습니다. 문이 부서지면서, 이 땅의 혈관과도 같은 지맥(地脈)의 일부가 찢겨나갔고, 그 틈으로 저쪽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흘러들어와 오염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 오염된 기운은 낮은 곳으로 흘러, 가장 약한 곳에 모여 고이기 시작했죠. 마치 맑은 시냇물이 한곳에 고여 썩어가며 늪이 되듯이.”
그녀의 시선이, 패철이 가리키는 동쪽을 향했다. 새벽안개 너머, 잠에서 깨어나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수백만 명이 살아가는 저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에, 썩어가는 늪이 생겨나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야 합니다.”
“저기에… 뭐가 있습니까.”
“새로운 ‘둥지’.”
서화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염된 늪은, 저쪽 세상의 것들이 현실에 뿌리내리고 번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화천회가 만들어낸, 이 땅의 첫 번째 암(癌)세포죠.”
그녀는 지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첫 번째 ‘절망’이 그곳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새벽 5시.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 빛은 희망이 아니었다. 다가올 또 다른 밤을 예고하는, 잿빛의 서곡일 뿐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골랐다. 피와 흙먼지로 뒤덮인 몰골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지운의 흰 셔츠는 찢어지고 검게 그을려 있었고, 서화의 검은 한복 역시 성한 곳이 없었다. 지나가는 새벽 운동객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일단… 이 모습으로는 움직일 수 없겠네요.”
지운이 말했다. 그의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기록의 강을 건넌 후유증인지, 감정의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학자로서의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돈도 없고, 신분증도 없습니다. 박물관에 두고 온 가방 안에 전부….”
“돈은 있습니다.”
서화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녀는 품 안에서, 기름종이로 감싼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그 안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는 금가락지 몇 개와 옥비녀가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가치를 지니죠.”
그녀는 지운의 찢어진 옷을 보았다.
“근처에 24시간 찜질방이라도 찾아보죠.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두 사람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골목을 따라 움직였다. 서울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신문 배달 오토바이 소리,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발소리.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의 소음. 하지만 지운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그의 눈에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록자’의 힘. 노인의 저주.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였다. 감정의 색. 출근길에 나서는 직장인의 머리 위로는 불안한 잿빛이, 손주의 손을 잡고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는 따뜻한 주황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색의 흐름 아래,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탁류(濁流)가 보였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오염된 지맥. 그것은 도시의 혈관을 흐르는 독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패철이 가리키는 동쪽으로 갈수록, 그 탁한 흐름은 더욱 짙어지고 거세졌다.
“보이나요?”
서화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물었다.
“당신이 보게 된 세상의 진짜 모습이에요.”
“끔찍하네요”
지운이 짧게 대답했다. 이것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세상의 이면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다행히, 낡은 상가 건물 지하에 허름한 찜질방을 찾을 수 있었다. 서화는 금가락지 하나를 카운터에 내밀었다. 주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내 금의 무게를 가늠하더니 말없이 열쇠를 내주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는 순간, 지운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온몸에 새겨진 상처와 멍이 비명을 질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낯설었다. 며칠 사이,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평생을 지켜온 이성과 합리주의가 깨진 자리. 그곳에는 차가운 광기와, 정체 모를 사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서화는 이미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신비로운 파수꾼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지치고 상처 입은 한 명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약국에서 사 온 듯한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처가 깊네요.”
그녀는 말없이 지운의 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인검을 쥐었던 손에 남은, 마치 낙인과도 같은 화상 자국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소독솜을 들고 상처에 닿자, 지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살이 타들어 가던 순간의 고통이 다시 떠오르는 듯했다.
“미안합니다.”
지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상처 입은 손과, 묵묵히 그것을 치료하는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향했다.
“이건 당신의 길이기 이전에, 나의 길입니다.”
서화는 붕대를 감으며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짜 기록자를 가려내고, 진짜 기록자를 찾아 그 길의 끝까지 함께하는 것. 그것이 대대로 제 가문이 짊어져 온 업(業)이니까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싸움입니다. 당신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연대감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지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평범한 인간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게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밖, 다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았다.
“이제 가야 합니다. ‘늪’의 냄새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어요.”
두 사람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패철이 가리키는 동쪽.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탔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변해갔다. 화려한 도심을 지나, 낡고 오래된 주택가. 그리고 마침내, 재개발을 앞두고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버려진 동네에 도착했다. 공기부터 달랐다.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서는 곰팡내와 함께, 광화문 지하에서 맡았던 그 비릿한 흙냄새가 섞여 났다. 길에는 쓰레기가 나뒹굴었고, 비어있는 상점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오직 까마귀 몇 마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며 전깃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패철의 검은 거북이는, 이제 미동도 없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네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건물.
붉은 벽돌로 지어진, 폐쇄된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병원이었다. 창문은 모두 합판으로 막혀 있었고, 정문은 육중한 쇠사슬로 감겨 있었다.
‘성심자애병원(聖心慈愛病院)’.
녹슨 간판의 글씨가, 그곳이 한때는 생명을 살리던 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생기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기운. 지운의 눈에는, 병원 건물 전체가 거대한 검은 종양처럼 보였다. 오염된 지맥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늪’.
“저기군요.”
“네.”
서화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첫 번째 ‘절망’이 태어난 곳.”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원 건물 3층. 합판으로 막힌 창문 하나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핏기 없는 얼굴의 간호사 한 명이 고개를 꺾은 채.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