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탑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인간의 상식, 역사,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그들이 굴러떨어진 곳은 비좁은 통로의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하나의 세계였다. 돔 형태의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그 표면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빛나는 광물들이 박혀 있어 장엄한 은하수를 연상케 했다. 저것은 단순한 광물이 아니었다. 지운은 직감했다. 이 땅의 정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맺힌 결정체, 지맥의 별들이었다.
그 인공의 하늘 아래, 거대한 도시가 잠들어 있었다. 검은 바위를 깎아 만든, 육중하고 기품 있는 기와 건축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수백, 수천 개의 횃불이 밝히고 있었다. 이곳은 폐허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혹은 누군가 매일같이 쓸고 닦는다는 듯,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기와, 이끼 하나 끼지 않은 석벽. 살아있는 도시였지만, 살아있는 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긴… 대체…?”
지운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의 평생에 걸친 고고학 지식과 역사적 데이터베이스가, 이 비현실적인 공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도 기록되지 않은, 신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거대한 지하 왕국.
“용의 뱃속입니다.”
서화가 그의 옆에 서서, 상처 입은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경외감과 깊은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땅의 가장 깊은 곳. 모든 지맥이 모이고 흩어지는 중심. 산 자들의 역사로부터 의도적으로 잊힌, ‘경계’의 도시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도시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수로로 향했다. 물은 칠흑같이 검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는 수많은 빛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강물에 풀어놓은 듯, 혹은 반딧불이 떼처럼. 그리고 그 신비로운 수로 위, 용의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된 나룻배 한 척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삿갓을 깊게 눌러쓴, 늙은 뱃사공. 그는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긴 장대로 배를 저어 두 사람이 있는 선착장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물을 가르는 소리도, 노 젓는 소리도 없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이 풍경의 일부가 영겁의 시간 동안 굳어진 그림자 같았다. 배가 멈춰 섰다. 뱃사공은 아무 말 없이, 뼈마디가 드러난 손가락으로 배에 오르라는 시늉을 했다.
“저 배를 타야 합니다.”
서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이 강은 ‘망각’의 강. 산 자의 발로는 걸어서 건널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발을 디디는 순간, 지운은 자신의 기억 일부가 안개처럼 희미해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배는 흔들림 하나 없이, 다시 물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장대로 수로 바닥을 짚어 나아갈 뿐이었다.
지운은 뱃전에 기대어,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물속에서 아른거리던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빛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이 강에 흘러든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물 위로, 수많은 얼굴과 풍경들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잊힌 왕조의 화려한 대관식. 처절했던 전쟁터의 함성과 핏빛 강. 수천 년의 희로애락이, 이 강물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 강을 건너는 자는, 자신의 기억 일부를 이곳에 흘려보내고, 동시에 타인의 기억을 엿보게 되는 것일까.
“저기.”
서화가 강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도시의 가장 중심부. 그곳에는 다른 건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9층 목탑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각 층의 처마 끝에는 작은 풍경(風磬)이 달려, 바람도 없는 이 고요한 공간에서 스스로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곳이 이 도시의 심장.”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기록’이 잠들어 있는 곳, 기록의 탑입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화천회가 노리는 신기(神器) 역시, 저 탑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배는 목탑 아래의 선착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풍경 소리가, 마치 잠든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처럼 슬프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무뎌진 채,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뱃사공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뭍을 향해 손짓했다. 서화가 품에서 작은 옥구슬 하나를 꺼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뱃삯이었다. 뱃사공은 그것을 받아 들고, 다시 어둠 속으로 배를 저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목탑을 향해 걸었다. 거대한 탑문 앞에는, 두 명의 수문장이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온몸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갑옷 인형. 세월의 흔적으로 곳곳에 푸른 녹이 슬어 있었지만, 그 위용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사람 키만 한,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월도(月刀)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갑옷 인형들의 투구 깊숙한 곳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끼기기긱-
수백 년간 움직인 적 없는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월도를 들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금속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기계음의 조합이었다.
“이곳은 산 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서화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그녀의 팔뚝에는, 용이 똬리를 튼 듯한 붉은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길을 지키는 자의 후손, 윤서화. 왕의 길을 따라 당도했으니, 문을 열어라.”
갑옷 인형들은 그녀의 문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붉은 안광이 몇 번 깜빡이며 무언가를 식별하는 듯했다.
끼기긱…
그들은 천천히 월도를 내리고, 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길을 비켜주던 갑옷 인형 중 하나의 붉은 눈이,
치직-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잠시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을 때, 그 빛은 이전과 같은 순수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 안에, 수장고를 가득 채웠던 검붉은 연기 같은 것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천회의 흔적.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너무나도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서화와 지운은, 동시에 그것을 보았다. 이 절대적인 성역(聖域)마저, 이미 오염이 시작되고 있었다.
끼이이이…
수천 년의 무게를 이고, 거대한 탑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불어온 바람이 횃불을 흔들었다.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두 사람의 뺨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바람에는 먼지 냄새 대신, 아주 오래된 종이와 마른 약초, 그리고 희미한 향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시간 자체가 응축된 듯한 냄새였다.
“들어가요.”
서화가 오염된 수문장을 경계하며, 지운을 재촉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이 성역마저 오염되었다는 사실은,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탑문은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닫혔다. 탑의 내부는, 외부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광활했다. 1층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닿는 서가들이 끝없는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두루마리와 고서들이 꽂혀 있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아득한 규모였다. 중앙에는 거대한 용의 척추뼈를 이어 만든 듯한, 순백의 나선형 계단이 9층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는….”
“이 땅의 모든 ‘기록’이 모이는 곳. 역사의 도서관입니다.”
서화가 말했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왕의 독백,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의 유언, 심지어는 돌멩이나 바람에 깃든 기억까지. 모든 것이 이곳에 기록으로 잠들어 있죠.”
지운은 압도되었다. 학자로서, 이곳은 그가 평생을 꿈꿔온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서가 사이를 걸으며, 손끝으로 책들을 스쳤다. 옻칠이 된 고서의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그 순간, 그의 피가 다시 반응했다.
‘기록자’의 피.
그의 눈에, 책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종이와 글자가 아니었다. 각각의 책에서, 희미한 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떤 것은 맑은 흰빛, 어떤 것은 슬픔을 머금은 푸른빛, 어떤 것은 분노로 타오르는 붉은빛. 그는 유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록’에 깃든 감정을 색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귓가에 희미한 속삭임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수천 년의 목소리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보이나요?”
서화가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당신의 힘이… 깨어나고 있군요.”
“이 빛들은….”
“기록에 담긴 감정의 색입니다. 당신의 선조들은 저 빛을 읽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왕에게 조언했죠.”
지운이 서가를 둘러보던 중, 그의 발이 한 곳에서 멈췄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유독 검고 탁한 빛을 내뿜는 책 한 권.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주변의 다른 기록들마저 그 책을 두려워하듯 희미하게 빛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건….”
그가 손을 뻗어 책을 꺼내려던 순간.
“만지지 마세요!”
서화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막았다.
“그건 ‘금서(禁書)’입니다. 너무나도 강한 원념이 깃들어, 읽는 자의 정신을 파괴하는 기록.”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검은 책이 스스로
스르륵-
펼쳐졌다. 그리고 책의 빈 페이지 위로, 검은 먹물이 번지듯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운과 서화가 아는 어떤 문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글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의 뜻을 바꾸어… 죽은 신을 섬기리라…
“화천회….”
지운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경전인가.”
“아니에요. 이건….”
서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탑에 들어온 누군가가… 새로 ‘기록’한 겁니다.”
화천회는 이미 이 탑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신기를 훔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탑 자체를, 이 땅의 모든 기록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위층에서,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어딘가 불길한 음색. 마치 뼈와 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9층으로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계단의 가장 위, 9층 난간에서 누군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길게 늘어뜨린 백발과 회색 코트의 실루엣만이 보일 뿐이었다. 수장고에서 사라졌던, 화천회의 노인이었다.
“이제야 당도했는가.”
노인의 목소리가 탑 전체에 울렸다.
“기록자의 후예와, 마지막 파수꾼.”
그는 천천히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그 소리는 칭찬이 아닌,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환영하네. 나의 서재에 온 것을.”
노인의 말이 끝나자, 1층의 모든 서가에서 검은 책들이 일제히 스스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장고에서 보았던 원념의 창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창끝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했다.
“이곳의 모든 슬픔과 분노는, 이제 나의 것이다.”
노인이 선언했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첫 번째 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