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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20화

빛의 기록

by 돌부처

죽음의 비가 내렸다.


수천 개의 검은 창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며 공간 자체를 찢는 듯한 기세로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단순한 투척이 아니었다. 탑을 가득 채운 모든 기록 속의 슬픔과 분노, 잊힌 자들의 저주가 응축되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는 원념의 현현이었다. 공기가 그 압력에 짓눌려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탑의 1층 전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꿰뚫으려는 거대한 가시밭으로 변해버렸다.


“큭…!”


서화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는 지운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품에서 손바닥만 한 옥경(玉鏡)을 꺼내 들었다.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녀가 마지막 남은 생명력까지 쥐어짜자, 옥경에서 절박한 빛의 막이 구형으로 터져 나와 두 사람을 감쌌다.


콰콰콰쾅-!


첫 번째 검은 창이 빛의 막에 부딪히는 순간, 귀를 찢는 폭발음과 함께 수백 개의 원혼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 발, 또 한 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창들은 빛의 막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옥경은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수천 개의 원념이 가하는 파상공세 앞에 빛의 막은 폭풍우 속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충격파가 고스란히 서화에게 전달되어, 그녀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빠직-!


마침내 옥경 표면에 첫 번째 금이 갔다.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의 핵심이 부서지는, 절망적인 파열음이었다. 맑은 옥 표면에 상처처럼 새겨진 금은 거미줄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그 틈으로 검은 기운이 뱀처럼 스며들었다. 빛의 막이 일그러지며 크게 흔들렸다.


“서화 씨!”


지운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는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허공에 흩날리는 것을. 방어막을 유지할 때마다 그녀의 생명이, 영혼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흐려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상관 마세요!”


서화가 버티고 서서 외쳤다. 그것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이 찾아야 합니다! 이 수많은 기록들 속에서… 저것들을 잠재울 길을!”


길. 지운의 머리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의 눈에는, 맹목적으로 날아오는 검은 창들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것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색’이 보였다. 참수당한 장수의 사무친 분노가 만들어낸 핏빛 붉은색. 역병으로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 빚어낸 시린 푸른빛. 모든 것을 잃고 버려진 자의 절망이 뭉쳐진 잿빛. 모두 격렬하고 파괴적인 감정의 색이었다.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감정의 폭풍은, 더 거대한 감정으로 맞서야 한다. 그는 미친 듯이 주변 서가를 훑었다. 수만 권의 책들이 저마다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부분은 창들과 같은, 어둡고 탁한 색이었다. 역사는 본디 승자의 기록 이면에 패자의 슬픔과 분노로 쓰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있다. 저기. 수많은 어두운 빛의 홍수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빛을 내뿜는 기록. 서가의 가장 높은 곳.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듯 먼지 쌓인 두루마리 하나가, 눈이 시릴 정도로 순수하고 따뜻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희생, 사랑, 자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듬고 정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긍정의 기록.


“저겁니다!”


지운이 손가락으로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콰직-!


바로 그 순간, 옥경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빛의 막이 유리처럼 깨지며 사라졌다. 수백 개의 검은 창이, 무방비 상태의 두 사람에게 쇄도했다.


“지금!”


서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깨진 옥경 조각을 손에 쥔 채, 지운의 등을 강하게 밀었다.


“가요!”


그녀는 자신을 방패 삼아, 지운이 단 몇 초라도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검은 창들을 향해 마주 섰다. 지운은 이를 악물고 서가를 향해 달렸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거대한 서가를 기어올랐다. 손톱이 부서지고 손바닥이 찢겨나갔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는 황금빛 두루마리에 닿았다. 그가 두루마리를 움켜쥐는 순간.


화아악-


따뜻한 빛이, 그의 몸을 통해 영혼 속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어느 왕의 위대한 업적도, 장군의 용맹한 기록도 아니었다. 역병이 창궐하여 모두가 서로를 피하던 시절. 자신의 어린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역병에 걸린 시체들을 끌어안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던,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어느 어미의 기록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그래서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사랑의 기록.


‘내 아가… 부디… 살아다오….’


글자가 아닌,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어미의 마지막 목소리가, 지운의 심장을 울렸다.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그의 눈물이 아니었다. 기록에 담긴, 수백 년 전 어미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지운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그는 글자를 읽지 않았다. 자신의 피와, 흐르는 눈물과, 그리고 각성한 영혼으로. 기록을 ‘외쳤다’.


콰아아아아아아-!


황금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사인검의 양기와는 다른,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따뜻한 빛이었다. 빛은 해일처럼 퍼져나가, 두 사람을 덮치던 검은 창들을 감쌌다. 파괴가 아니었다. 정화였다. 분노의 붉은빛과 슬픔의 푸른빛이, 따스한 황금빛 속에서 봄눈 녹듯 스러졌다. 비명을 지르던 원념들이, 오랜 고통을 잊고 평온한 빛의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탑을 가득 채웠던 죽음과 증오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적.


모든 공격이 멎었다. 서화는 온몸에 자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9층 난간의 노인 역시, 처음으로 가면 같은 표정을 잃었다. 그의 눈에는 순수한 경악이 서려 있었다.


“네놈… 기록을… 강제로 각성시켜 그 본질을 뒤틀었는가….”


그는 기록자의 힘을 이용해 원념을 ‘지배’할 줄만 알았지, 그 힘으로 기록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노인의 시선이 지운에게서, 그가 들고 있는 황금빛 두루마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경악은 이내 지독한 탐욕의 빛으로 변했다.


“훌륭하다, 기록자의 후예여.”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힘, 이제 내가 거두어주마.”


노인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난간을 박차고, 9층에서부터 직접 몸을 날렸다. 그의 등 뒤로, 박쥐 날개처럼 검은 기운이 펼쳐졌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 ‘오래된 슬픔’이라 칭했던, 악마 그 자체였다.


악마가 내려왔다.9층에서부터 1층까지, 그 거리는 무의미했다. 그는 중력을 거스르듯, 소리 없이 활강했다. 공기의 저항조차 그를 비껴가는 듯했다. 그가 펼친 검은 날개는 주변의 횃불 빛마저 빨아들여, 그의 강림은 마치 검은 혜성이 떨어지는 듯했다. 탑 안의 모든 소음이 그에게 흡수되어, 완벽한 정적 속에서 오직 그의 존재감만이 거대한 압력처럼 짓눌러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지운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황금빛 두루마리를 쥔 손 외에는, 몸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기록을 강제로 각성시킨 대가였다. 영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낸 듯한, 완전한 탈진. 그의 정신은 이름 없는 어미의 슬픔과 자신의 무력감 사이에서 아득하게 표류하고 있었다. 그는 노인의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 거대한 폭풍 앞의 촛불일 뿐이었다.


“안 돼…!”


피투성이의 서화가 비틀거리며 지운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깨진 옥경 조각을 단검처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다시 피가 흘렀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이것은 무의미한 저항이다. 노인의 눈에는 오직 지운과, 그가 쥔 두루마리만이 보였다. 탐욕.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기록’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뒤틀린 욕망. 그가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검은 촉수 같은 기운이 뱀처럼 뻗어 나와, 지운의 심장을 향했다. 이제 끝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탑 전체가 울었다. 낮고, 장엄한 용의 울음소리. 소리의 근원지는, 탑의 중앙을 관통하는 순백의 나선형 계단이었다. 용의 척추뼈로 만들어졌다는, 바로 그 계단.


화아아아악-!


계단을 이루던 뼈마디 하나하나에서, 눈부신 백색 광채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운이 불러냈던 황금빛과는 다른, 차갑고 장엄한 빛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질서 그 자체의 빛. 수천 년간 이 탑을 지탱해 온, 가장 근원적인 힘. 빛은 거대한 용의 형상을 이루며 솟아올라, 추락하던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노인의 검은 촉수가, 빛의 용과 허공에서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


폭발은 없었다. 소리 없는 상쇄. 빛과 어둠이 서로를 집어삼키며,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무음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노인의 몸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고통’의 빛이 스쳤다.


“감히…!”


노인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 탑의 의지(意志)가… 일개 필멸자의 편을 들며… 나를 거부하는가!”


그는 이 탑의 기록을 오염시켜 자신의 서재로 삼으려 했지만, 탑 자체가 가진 힘은 계산하지 못했다. 이곳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이 땅의 역사를 지키는, 살아있는 성역이었다. 빛의 용은 노인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힘을 억지로 깨운 탓에, 용의 형상은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공격이 아닌, 방어. 그것이 탑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서화의 목소리는 찢어질 듯한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휘청이는 지운의 팔을 거의 잡아채다시피 끌었다.


“저 계단으로!”


“하지만 저건… 위로 가는 길이잖아요!”


지운이 탈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9층의 악마에게로 향하는 죽음의 길로 보일 뿐이었다.


“계단이 아닙니다! 저것은 용의 척추! 이 탑의 중심이자 시작과 끝을 잇는 길입니다! 유일한 탈출로예요!”


서화는 그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며 나선형 계단을 향해 달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다. 노인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중력처럼 그들을 짓눌렀다. 등 뒤에서는 빛의 용과 노인의 흑마술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무음의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노인은 그들을 막으려 몸부림쳤지만, 자신을 휘감은 순백의 빛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증오와 살의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필사적으로 계단에 다가서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등골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도망쳐라, 쥐새끼들….”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뇌리에 직접 박혀왔다.


“하지만 기억해라. 기록자의 후예여. 네놈이 각성시킨 그 힘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갉아먹고, 네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가장 끔찍한 저주가 될 것이다.”


저주 섞인 예언. 지운은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의 발이, 마침내 용의 척추 계단의 첫 칸에 닿았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계단이 있던 공간이 사라지고, 발밑이 아득한 우주 공간처럼 변했다. 수만 개의 기록들이 별처럼 떠다니는, 빛의 터널. 두 사람의 몸이, 터널 속으로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지운은 보았다. 자신들이 사라진 1층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모습을. 그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빛의 용이 사라진 자리에 선 그는, 분노하는 대신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혹은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가거라.’


노인의 목소리가, 지운의 의식 속 마지막에 울려 퍼졌다.


‘가서… 더 큰 절망의 씨앗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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