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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18화

맛 없는 기억

by 돌부처

계단 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것이 다시 웃었다.


키득-


그 소리는 표면적으로는 어린아이의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늙은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 원한에 사무쳐 울부짖는 여인의 흐느낌, 숨이 넘어가는 병자의 마지막 가래 끓는 소리가 수십 겹으로 뒤섞여 있는 끔찍한 괴음(怪音)이었다. 석굴의 벽과 천장, 발밑을 흐르는 물길까지 그 소리에 진동하며 되울려왔다.


앞은 칠흑 같은 어둠과 정체불명의 존재로 막혔고, 등 뒤에서는 그것의 발자국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완벽한 함정. “이곳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자”는 사악하고 끈적한 초대가 공기 중에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서화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월광석을 앞으로 내밀었다. 희미한 녹색 빛이 계단 몇 칸을 비추었지만, 빛의 경계 너머로 개얌이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존재감은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석굴 전체를 짓눌렀다.


공기는 꿀처럼 끈적하게 변했고, 이제는 썩은 이끼와 오래된 슬픔의 냄새까지 머금은 듯했다. 한 번 들이마신 숨은 목구멍을 틀어막는 진흙처럼 무거워져 뱉어내기조차 힘들었다. 지운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 고동 소리마저 끈적한 어둠에 먹혀들어 가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지운의 공격적인 기억을 맛본 개얌이의 집중이, 이제는 옆에 있는 서화에게로 옮겨갔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네 차례.”


그 속삭임은 공기를 타고 온 것이 아니었다. 서화의 영혼에 직접, 차가운 바늘처럼 박혀들었다.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너무나도 그리웠으며, 그래서 더욱 잔인하고 파괴적인 목소리였다.


“…서화야. 이 어미를… 기어이 혼자 두고 가려는 게냐.”


애절하고, 원망이 섞인 여인의 목소리. 서화의 어머니, 그녀가 아주 어릴 적 병상에서 잃고, 다시는 꺼내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가슴 가장 깊은 곳, 가장 단단한 상자 속에 봉인해두었던 기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울려 나왔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병약했던 어머니 특유의 희미한 숨소리, 약초 냄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체념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서화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지운은 그녀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보았다. 언제나 상황을 꿰뚫어 보던 그 예리한 눈빛이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강철처럼 단단하고 완강하던 그녀의 얼굴에, 예리한 칼날에 찍힌 유리처럼 선명한 균열이 생겼다. 그녀의 정신을 지탱하던 모든 방벽이,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


그녀의 입술에서 짧고 고통스러운, 거의 들리지 않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부정의 외침도, 공포의 비명도 아니었다. 봉인했던 기억의 상자가 강제로 열리며, 억눌렀던 슬픔이 둑처럼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그녀를 지탱하던 모든 의지의 끈이 끊어졌다. 월광석을 단단히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리며, 돌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툭-


돌멩이가 물 위로 떨어지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희미한 녹색 빛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어둠에 게걸스럽게 삼켜졌다. 석굴 전체가 완전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잠겼다.


“서화 씨!”


지운이 절규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갇혀버렸다. 개얌이는 그 작은 균열의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 같은 손길이 어둠 속에서 뻗쳐 나와, 넋을 잃고 선 서화의 뺨을 부드럽게,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더듬었다. 실체 없는 손이었으나, 그 차가움은 살아 있는 육신의 체온을 남김없이 갉아먹는 듯했다. 지운의 머리에 서화의 경고가 번개처럼 스쳤다.


“개얌이는 흉내 내는 것. 기억을 훔쳐 먹이로 삼는다.”


그렇다면, 먹이를 주지 않으면 된다. 아니, 먹을 수 없는, 맛없는 먹이를 던져주면…


지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래서 가장 약점이 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그리움과 죄책감, 두려움과 연민.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아버지의 얼굴, 김 교수의 마지막 눈빛, 공포에 질린 병사의 얼굴, 그리고 지금 고통받는 서화의 표정까지.

모두 지워냈다. 대신 그 텅 빈 자리에, 차갑고 건조하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데이터’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조… 왕의 이름은 의자요, 무왕의 맏아들이다. 무왕이 재위한 지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그의 머릿속에, 감정이 배제된 글귀가 기계처럼 줄줄 흘러갔다. 연도, 사건, 인물의 이름. 오직 정보의 나열. 키득거리던 웃음이, 순간 뚝 멎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기대했다가 돌멩이를 씹은 듯한 당혹감이 어둠 속에 퍼졌다. 석굴이 완전한 정적에 잠겼다.


지운은 더 세게, 더 빠르게 읊조렸다. 이제는 소리 내어, 주문을 외우듯.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 551년,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침공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하다…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하다…”


물 위를 때리던 발자국 소리마저 멎었다. 어둠이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분노를 담은 듯 짓눌러왔다. 지운은 멈추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이제는 무기질적인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탄소-14 동위원소의 반감기는 5730년. 질소-14가 우주선(宇宙線)에 의해 양성자를 잃고 변환되어 생성…”


…크…으으…


어둠 속에서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이의 웃음이 아닌, 굶주린 괴물이 상한 음식을 씹다 토해내는 듯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울음이었다. 개얌이가 그의 기억을 파고들었으나, 거기엔 아무런 ‘맛’이 없었다. 감정이라는 양념이 완전히 빠진, 차갑고 딱딱한 돌덩이 같은 데이터의 나열. 그것은 먹을 수 없는 독이었다.


“지금!”


지운이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그의 외침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을 비워낸 자리에 응축된, 순수한 의지의 폭발이었다. 그 소리는 서화의 정신을 옭아매던 슬픈 환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충격파가 되었다. 서화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던 어머니의 환영이 유리처럼 깨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과 지운의 절박한 얼굴이 들어찼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차가운 물속으로 손을 뻗어, 희미한 온기가 남은 월광석을 더듬어 움켜쥐었다. 희미했던 녹색 빛이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듯, 다시금 강렬하게 타올랐다.


빛은 계단 위, 미지의 어둠이 아닌 천장을 향했다. 지운의 직감을 따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개얌이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났다.


그것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인간이었던 무언가의 형체. 피부는 빛 한 점 닿지 않은 심해어처럼 창백하고 반투명했으며, 그 아래로 검은 혈관이 나무뿌리처럼 비쳐 보였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물 위에 닿아, 마치 이 석굴 전체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거미처럼 기이하게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관절이 없는 듯 자유자재로 뒤틀렸고, 찢어진 입은 턱까지 찢겨 검고 깊은 구멍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지운이 쏟아낸, 감정이 거세된 ‘맛없는’ 기억이 그것의 정신을 뒤틀은 듯했다. 감정을 양식으로 삼는 존재에게, 순수한 정보의 나열은 모래를 씹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 길은…”


서화가 숨 가쁘게 외쳤다. 그녀의 눈은 고통스러워하는 개얌이와, 눈앞의 돌계단, 그리고 바닥에 놓인 낡은 짚신을 번갈아 훑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왕이 오르던 길이 아닙니다. 왕을 ‘위해’ 누군가 끌려가던 길… 산 제물이 바쳐지던 길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악과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왕의 피난처라는 ‘왕의 길’에 어째서 이런 사악한 존재가 둥지를 틀고 있단 말인가. 모순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왕을 위한 길이 아니라, 왕을 위해 희생될 제물을 이끄는 길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개얌이는 이 길의 파수꾼이자, 첫 번째 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계단 옆의 이끼 낀 벽을 미친 듯이 손으로 짚어 나갔다. 단순한 탐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문 대대로 내려온 기록, ‘진짜 왕의 길’에 대한 단편적인 구절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보이는 길이 길이 아니요, 감춰진 맥이 진짜 길이다.’ 그녀는 주변의 돌과 미세하게 다른 질감을 가진, 이끼가 유독 얕게 낀 돌 하나를 찾아냈다. 그녀가 남은 힘을 다해 그 돌을 힘껏 눌렀다.


쿠르르릉-


돌계단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요동쳤다.계단이 통째로 옆으로 미끄러져 움직이며,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새로운 통로가 드러났다. 밝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이쪽이에요! 진짜 왕의 길은 숨겨져 있었어요!”


그 순간,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난 개얌이가 귀청을 찢는, 분노와 굶주림이 뒤섞인 비명을 토해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음파 병기와도 같은 울림은 석굴 전체를 찢어발기며, 횃불 없는 어둠마저 흔들었다. 물 위의 파문이 들끓어 두 사람의 다리를 감싸며 잡아끌려는 듯했다.


“빨리!”


서화가 지운의 팔을 끌었다.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새로운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개얌이의 그림자가 천장에서 채찍처럼 뻗쳐 나왔다. 긴 팔이 지운의 발목을 스쳤다. 얼음 같은 손길에, 지운의 피부가 순간 타들어가듯 시커멓게 변하며 극심한 고통이 퍼졌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이미 중력에 이끌려 가파른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몸이 부서질 듯 구르다, 마침내 단단하고 평평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지운이 고통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은 넋을 잃었다.


앞에 펼쳐진 광경은 동굴이나 통로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은 마치 인공적으로 깎아낸 밤하늘처럼 느껴졌고, 그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잠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검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전각과 탑,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기와지붕의 행렬은 지상의 어떤 궁궐보다도 웅장했다. 그 도시를 밝히는 것은 수백, 아니 수천 개에 달하는 횃불이었다.


벽과 기둥에 박힌 횃불들은 아무런 연료도 없이,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을 별처럼 스스로 타오르며 공간 전체를 장엄한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중앙을, 칠흑같이 검푸른 강물 같은 수로(水路)가 생명의 혈맥처럼 고요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하여 황금빛 횃불들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다.그 위에는, 뱃머리에 용의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된 나룻배 한 척이 고요히 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새로운 기록자를 기다려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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