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얌이
…얼쑤.
그것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추임새인 동시에, 수백 년 묵은 원혼이 토해내는 저주였다. 소리는 등 뒤, 바로 목덜미 근처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식간에 증식하여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석굴의 축축하게 젖은 벽이 북처럼 울렸고, 바닥을 흐르는 차가운 물은 소리의 파동에 맞춰 기이한 물결을 일으켰다. 천장에 매달린 이끼 낀 종유석 틈새에서는 바람 소리처럼, 혹은 흐느낌처럼 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공간을 이루는 모든 물질이, 무생물조차도 자의지를 가진 것처럼 공명하며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 울림은 공기를 매질로 삼는 단순한 파동이라기보다, 살갗의 모든 솜털을 곤두세우며 직접 스며들어 뼛속을 저리게 만드는 정신적인 공격에 가까웠다.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그 기괴한 합창의 일부가 되어 박자를 맞추는 듯했다. 마치 이 석굴 자체가 잠에서 깨어난 하나의 거대한 성대(聲帶)가 되어, 태고의 주인을 위해 환영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지운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허파꽈리 하나하나가 얼음 결정으로 변하는 듯, 폐 전체가 차갑게 굳어버리는 감각이었다. 숨을 쉬는 행위 자체가 이 공간의 주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무모한 도발처럼 느껴졌다. 수장고에서 화천회와 그들의 영수를 상대했을 때 느낀 공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공포는 뜨거웠다. 인간의 탐욕과 광기가 들끓는, 용광로 같은 악의였다. 그들은 뒤틀렸을지언정 욕망과 목적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그들의 행동에는 최소한의 인과율이 존재했다. 이해하고, 분석하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어둠 속에 도사린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태고의 존재였다. 인과율을 초월하고,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순수한 혼돈과 악의 그 자체였다. 그것의 존재감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모든 열을 게걸스럽게 빼앗아가는, 절대 영도에 가까운 차가움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냉기가 아니었다. 기억의 온기, 감정의 열기, 살아있다는 실감마저 얼려버리는 근원적인 냉기. 생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무(無)로 되돌리려는 듯한, 지독한 공허함이었다. 지운은 자신의 영혼이 그 차가움에 서서히 마모되어 사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움직이지 마세요.”
윤서화가 거의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밧줄처럼 팽팽했다. 월광석을 든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녹색 빛을 거의 꺼지기 직전까지 줄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보는 종류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창백함에 물들어 있었다. 늘 침착하고 강인해 보이던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마세요. 그것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고, 어떤 말에도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서화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경고가 아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금기를 어기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닥친다는 옛이야기처럼.
“개얌이는 흉내 내는 것. 따라 하는 것. 기억을 훔쳐 가장 약하고 무른 틈을 파고드는 그림자입니다. 보는 순간, 대답하는 순간,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영혼에 닻을 내리고, 결국엔 잡아먹히게 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참방… 참방…
맑고 섬뜩한 물소리가 파문처럼 번졌다. 어린아이가 맨발로 천진난만하게 물장난을 치는 듯한 소리. 하지만 그 소리에는 아이 특유의 온기가 전혀 없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만이 담겨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리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발밑의 물결이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부드럽게 발목을 감싸며 흔들렸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차갑고 끈적한 시선이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굶주림이 뒤섞인, 먹잇감을 관찰하는 짐승 같은 시선이, 두 사람의 등과 목덜미를 끈질기게 핥았다.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휘감기 전, 먹잇감의 체온과 심장박동을 느끼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지운의 혈관이 차갑게 당겨졌다.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피, ‘기록자’의 피가 이 어둠의 주인이 품은 기록을 강제로 읽어내고 있었다. 원치 않는 지식이, 고통스러운 감각과 함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수백 년 전, 어느 겨울. 궁궐에 창궐한 역병을 피해 이 비밀 통로로 숨어든 어린 왕자. 왕의 유일한 적통이었으나, 병약하다는 이유로 잊혀진 소년. 캄캄하고 축축한 이 길에서 홀로 떨다 숨을 거두며, 자신을 버린 세상을 저주했던 마지막 순간. 그 어리고 순수했기에 더욱 지독했던 원념이,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어둠과 엉겨 붙다가, 결국은 잡아 먹혔다. 개얌이였다. 왕의 길에 버려진, 또 다른 왕의 그 시리도록 슬프고 지독한 원념을 잡아 먹은.
“지운아…”
바로 등 뒤에서,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가 흘렀다. 지운은 온몸의 근육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수년 전, 병상에서 그의 손을 잡고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목소리. 그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하고 다정했던 어투.
“이리 오너라… 할애비가 아직 널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두어 미안하구나…”
눈시울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이성은 이것이 함정이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뼛속 깊이 사무친 그리움이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운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탁.
서화가 쇠갈퀴 같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려요! 그건 당신의 기억을 읽어낸 환청일 뿐입니다!”
숨이 턱 막히며 솟아오르려던 눈물이 도로 빨려 들어갔다. 그제야 지운은 깨달았다. 저것은 추억을 더럽히고, 그리움을 미끼로 삼는 사악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키득… 키드득…
아이의 웃음이 다시 퍼졌다. 속임수가 통하지 않자 즐거워하는 듯한, 잔인한 웃음소리였다. 이번에는 물길 저편에서, 또 다른 곳에서, 그리고 머리 바로 위에서. 석굴 전체가 웃었다. 등골이 얼어붙다 못해 부서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가야 합니다. 이 물길을 따라서.”
서화가 거의 반강제로 그를 끌었다.
“이 맥의 정화하는 힘만이, 저것의 접근을 아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의 발밑에서 나는 물소리가 다른 소리와 섞이지 않도록, 숨소리 하나까지 죽이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러나 개얌이는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참방… 참방…
그 발자국 소리는 여전히 끈질기게 물 위를 맴돌았다. 때로는 앞에서 길을 막는 듯, 때로는 바로 등 뒤에서 목덜미를 노리는 듯.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이번에는 지운의 왼쪽 귓가에 대고 직접, 차가운 입김과 함께 속삭였다.
“한 박사… 살려주게… 너무 추워… 여긴 너무 어둡고 춥다네…”
김정호 교수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었다. 죽음 직전의 가래 끓는 소리,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내뱉던 그 절박함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박물관 수장고에서 죽어가던 순간, 차갑게 식어가던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던 그 무력감, 마지막까지 지운을 붙잡던 애처로운 눈빛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네가 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무언의 원망이 담겨, 지운의 죄책감을 후벼 팠다.
그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오른쪽 귓가에서는 다른 울림이 파고들었다. DMZ 땅굴의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겁에 질린 젊은 병사의 목소리였다.
“거울 속에… 눈알 없는 할머니가… 저를 보고 웃고 있습니다… 바로 제 뒤에 있습니다, 박사님…!”
공포에 질려 거의 울먹이던 그 떨림,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한 인간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지운이 겪었던 모든 공포가, 외면하고 싶었던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이, 살아있는 망령처럼 귓가를 번갈아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개얌이가 그의 기억을 훔쳐,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재조립하여 그의 정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이 날카로운 칼날에 겹겹이 갉아먹히는 소리가 들릴 만큼, 끔찍하고 직접적인 고통이었다.
“듣지 마세요.”
서화의 목소리가 이를 악문 듯 떨렸다. 그녀 역시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게 당신의 감정을 먹이로 주지 마세요!”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 1분인지, 한 시간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숨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짧아졌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그때, 앞서가던 서화가 멈춰 섰다. 그녀의 등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저기.”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월광석이 어둠의 한 지점을 비추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석굴이 끝나는 지점. 위로 향하는, 이끼 낀 가파른 돌계단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 끝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출구였다. 혹은, 출구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지친 정신은 이성적인 판단을 거부하고 희망에 매달리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안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심장이 바닥 없는 늪으로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계단 맨 아래, 물에 젖어 축축한 바닥에 작은 짚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우연히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것인 듯, 바짝 쪼그라든 낡은 짚신.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어 검게 변색된, 하나의 유물이었다. 그 짚신에서는 깊은 슬픔과 지독한 외로움의 감정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벽에는, 방금 전에 새긴 것처럼 선명한 긁힌 자국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손톱으로, 혹은 짐승의 발톱으로 파낸 듯 날카롭고 원한에 서린 필체였다.
『…ㅅ…ㅜ…ㄹ…ㄹ…ㅐ…』
지운은 그 글자를 읽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네가 술래.
그것은 함정이었다. 이 길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대한 놀이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술래의 규칙에 맞춰 놀이에 참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순간, 계단 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에서, 기다렸다는 듯한 울림이 물방울처럼 아래로 뚝 떨어졌다.
…얼쑤.
그 소리는 이제 명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놀이의 다음 단계를 알리는 신호. 그들이 마침내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음을 환영하는 목소리. 그들이 필사적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것은 이미 그 길의 끝에서 술래가 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차갑고 비릿한 바람이 계단 위에서부터 불어왔다.
바람은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 할아버지의 다정한 부름, 병사의 공포 어린 신음, 교수의 마지막 외침이 모두 뒤섞인 끔찍한 합창을 실어 나르며,
두 사람의 등 뒤를 서서히, 아주 서서히, 차갑게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