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波紋)
금빛 검기는 빛의 속도로 날아갔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흐름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응축된 태양의 정수이자, 모든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절대적인 양기(陽氣)의 파동이었다. 검기가 공간을 찢고 나아가는 순간, 수장고 전체를 짓누르던 원념의 공기가 정화되듯 맑게 흔들렸다. 끈적하고 비릿하던 공기가 순간적으로 맑고 청량하게 변하는 기이한 감각. 지운은 자신의 검격이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이 공간을 지배하던 영적인 법칙 그 자체를 베어내고 있음을 직감했다.
노인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도 없었다. 사인검의 의지는 이미 그를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그는 대신, 마지막까지 차갑고 계산적인 움직임으로 제단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아이를 낚아채 자신의 몸 앞으로, 살아있는 방패처럼 내세웠다. 그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었다. 마치 소모품을 사용하는 듯한 무감정한 동작이었다.
키에에에엑-!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녀의 흐느낌, 노파의 저주가 한꺼번에 뒤섞여 합쳐진 듯한 기괴한 합창. 그 소리만으로도 고막을 찢고 정신을 어지럽힐 만큼 끔찍한 원념의 울부짖음이었다. 금빛 검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확히 아이의 몸을 관통했다.
그러나 그 순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이의 몸에서 단순히 검은 연기가 흩어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검기가 뚫고 지나간 배의 틈으로, 수백 개의 작고 검은 손들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마디마디 관절이 반대로 꺾인 기형적인 팔들. 그것들은 각기 다른 원념을 품은 듯, 어떤 것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허공을 더듬었고, 어떤 것은 분노에 차 주먹을 쥐었다. 그 팔들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지운과 서화를 향해 필사적으로 닿으려는 듯 발버둥 쳤다. 마치 지옥의 심연에서부터 뻗어 나온 망자들의 손길처럼, 살갗을 스치는 듯한 한기가 퍼져나갔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생명을 얻은 뱀처럼 스스로 뻗어 나와 돔 형태의 높은 천장에 닿았다. 그 머리칼이 덜컥거리는 형광등을 휘감고 기어가더니, 주변의 유물 보관함을 덮쳤다.
콰직! 쨍그랑!
보관함들이 뒤틀리며 안에 든 토기와 도자기가 깨져 나갔다. 깨진 틈에서 흘러나온 새로운 원념이 피어올라, 아이의 몸으로 게걸스럽게 빨려들어갔다. 상처를 회복하려는 듯, 아이의 몸이 검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금빛 검기의 순수한 힘은 막을 수 없었다. 원념을 태우고 정화하는 빛의 힘이 아이의 몸을 꿰뚫고, 끝내 그 존재 자체를 산산이 찢어버렸다.
키이이이이이익-!!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아이의 몸이 수천 조각의 검은 연기로 폭발했다. 그 잔해는 마치 살아 있는 벌레 떼처럼 사방으로 달라붙었다가, 결국 빛 속에서 서서히 재가 되어 사라져갔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 찢어진 입의 형상이 마지막까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소리로 짧게 속삭였다.
"곧… 다시…"
카아아아앙-!
검기는 아이의 몸을 뚫고 나가, 마침내 제단 위의 역십이지신상 동경을 정확히 때렸다. 놀랍게도, 거울은 깨지지 않았다. 강철조차 녹일 듯한 양기의 정수를 맞고도, 그 표면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대신 거울 전체가 쇳물이 녹는 듯한 붉은빛을 띠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표면에 음각된 역십이지신의 문양이, 마치 산 채로 불에 지져지는 것처럼 일그러지며 무언의 비명을 질렀다. 한순간, 쥐부터 돼지까지, 열두 짐승의 형상이 전부 일제히 피눈물을 흘리며 눈을 부릅뜨는 듯한 환영이 스쳤다.
콰아아아아앙-!
사인검의 양기와, 거울에 봉인된 수만 개의 원념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맞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소리가 없었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순수한 에너지의 방출. 수장고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육중한 철제 선반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지고, 수만 점의 유물이 역사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의식을 치르던 화천회 신도들은 빛과 어둠이 뒤섞인 충격파에 휘말려 종잇조각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큭…!”
지운은 그 엄청난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손아귀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며, 그를 붙들고 있던 사인검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쨍그랑-
찬란했던 금빛을 모두 잃고 평범한 고철처럼 변한 검이 차가운 바닥 위를 굴렀다. 검과의 연결이 끊기자, 지운의 머릿속으로 폭풍처럼 흘러들던 수백 년의 기록과 기억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웅들의 서사, 왕들의 고뇌, 장인들의 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텅 빈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극심한 현기증과 고통뿐이었다. 그는 다시 평범한 학자, 한지운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극심한 탈력감.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처럼, 아니, 납처럼 무거워졌다.
“콜록… 콜록…!”
자욱한 먼지와 연기 속에서 서화가 기침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한지운 씨! 괜찮아요?!”
지운은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폭발의 중심지를 바라보았다. 제단은 흔적도 없이 박살 나 있었고, 주변은 마치 전쟁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기이한 거울 역시 사라져 있었다. 연기처럼, 혹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끝난 건가요?”
지운의 목소리는 타들어 간 듯 갈라져 나왔다.
“아니요.”
서화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더 깊은 불안이 품어져 있었다.
“의식은 잠시 멈췄을 뿐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겁니다. 더 강해져서.”
그녀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수장고를 가득 채웠던 검붉은 연기는 옅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파에 쓰러진 신도들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이자, 남은 연기가 그 피를 양분 삼아 다시 뱀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유물 파편마다 붉은 눈동자가 생겨나, 그들을 감시하듯 미세하게 깜빡이는 환각까지 보였다.
“일어나요.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서화가 지운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지운의 다리는 풀려버린 용수철처럼 후들거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문이…”
그는 절망적으로, 굳게 닫혀버린 강철문을 가리켰다.
“저 길은 이미 죽었습니다.”
서화는 다른 곳을 가리켰다. 왕의 옥새와 면류관이 보관되어 있던 선반. 거대한 폭발의 충격으로 선반이 옆으로 쓰러지며, 그 뒤에 수십 년간 가려져 있던 벽이 드러나 있었다. 그 벽면에는, 이 현대적인 수장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석문(石門)이 있었다. 거대한 통돌을 깎아 만든 작은 문. 자물쇠 대신, 문의 중심부에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태극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 문양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모되지 않은 채, 기이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저건…?”
지운이 숨을 삼켰다. 박물관의 설계도에서는 본 적 없는 구조물이었다.
“진짜 왕의 길입니다.”
서화가 문을 경계하며 눈을 좁혔다.
“박물관을 설계할 때부터, 이 길의 존재를 아는 자들만 남겨둔 비상통로죠. 겉의 길이 아닌, 속의 길입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쓰러진 신도들 중 몇몇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힘을 다해 석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서 서화가 지운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열어야 합니다.”
“내가요? 어떻게…”
“당신은 기록자의 후예. 당신의 피에는 왕의 길을 열 자격이 있습니다.”
서화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인검을 쥐었을 때 생긴, 마치 낙인처럼 선명한 화상 자국.
“그 손으로, 문을 미세요. 당신의 자격이 문을 열 겁니다.”
지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평생 책과 유물만 만져온 부드러운 학자의 손. 이 손에 그런 엄청난 자격이 있을 리가.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화상 입은 손을 차가운 석문에 가져가,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쿠구구구궁…
수백 년, 혹은 그 이상 닫혀 있었을 무거운 문이, 놀랍도록 부드럽게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 화상 자국과 문의 태극 문양이 희미한 빛으로 공명하는 듯했다. 문 너머는, 더 깊고 근원적인 어둠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이끼와 흙냄새를 품은 차가운 바람이 먼저 스며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지하의 공기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던, 태곳적 시간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희미하게…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서늘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