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의 피
석문 너머의 어둠은, 수장고에서 보았던 검붉은 연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많은 죽음과 원념이 뒤섞여 흐르는, 살아있는 것을 질식시키는 불길하고 탁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뜨겁고 역겨운 어둠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어둠은 달랐다. 수천 년,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태고부터 쌓여온 순수한 암흑 그 자체였다. 그것은 깊고, 무거웠으며,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폐부처럼 느리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듯했다. 차갑고,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중력과 같은 어둠. 그 존재감만으로도 정신을 짓눌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지운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게 ‘먹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졸졸졸…
영원할 것 같은 정적과 고요 속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물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감각이었다. 그 소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고, 동시에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경고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마치 이 길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윤서화가 먼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긴장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스르르 사라지는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뒤편, 이제는 희미해진 수장고에서는 이미 쓰러졌던 화천회 신도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 뼈와 살이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였다. 그들의 관절은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눈동자는 완전히 뒤집혀 흰자만 번뜩였다. 마치 낡고 악의에 찬 인형사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들처럼, 끊어진 팔다리를 질질 끌며 석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원념에 잠식된 움직이는 시체, 그 자체였다.
지운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석문 안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밀어 넣었다. 그의 등 뒤로 시체들의 손톱이 허공을 긁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그가 완전히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
쿠우우웅-
거대한 석문이 외부의 힘 없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육중한 마찰음은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처럼 묵직하고 최종적으로 들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틈새로 보인 것은 흰자위를 번뜩이며 달려드는 신도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수장고의 아수라장과 광기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남은 것은 서늘한 물소리와 두 사람의 거칠고 불규칙한 심장 고동뿐이었다. 그 고동마저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처럼 기괴하게 울렸다.
“여긴… 대체…”
지운은 현대인의 본능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플래시를 켜려 했다. 한 줌의 인공적인 빛이 절실했다. 그러나 서화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막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안됩니다. 빛은 길을 밝히지만, 동시에 원치 않는 것들의 이목까지 집중시킵니다. 이곳의 어둠은…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손님일 뿐이니,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대신 그녀는 품에서 자그마한, 표면이 매끄러운 돌멩이를 꺼냈다. 입술을 가까이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음절로 속삭이자, 평범해 보이던 돌은 서서히 희미하고 서늘한 녹색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월광석(月光石). 달의 정기를 품은 돌. 어둠에 익숙한 자들만이 길을 밝히기 위해 쓸 수 있다는, 태고의 등불이었다.
음산한 녹색 빛은 그들이 서 있는 좁은 석굴의 풍경을 드러냈다. 사방의 벽면은 축축한 물이끼로 두껍게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발목까지 차오른 수정처럼 맑은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지운은 무심코 휘청이다가 손을 물에 담갔다. 그러자 사인검을 쥐며 입었던, 불에 덴 듯한 화상 자국 위로 서늘하고 청량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욱신거리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가듯 가라앉았다.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다. 그의 몸속 깊은 곳, 사인검의 기운에 휘둘려 흐트러졌던 기(氣)의 흐름 자체가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이건… 단순한 물이 아니군요.”
“정화의 맥(脈)입니다.”
서화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그녀는 월광석을 든 채 주변을 경계하며 말을 이었다.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을 때부터, 왕실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던 비밀 통로. 왕에게만 허락된 최후의 피난처이자, 이 땅의 가장 큰 용의 혈맥(血脈) 위에 놓인 길입니다. 이 물은 용의 혈맥에서 솟아나는 영수(靈水)죠. 부정한 것을 씻어내고 기운을 바로잡습니다.”
지운은 어둠 속에 울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록자의 후예… 그게 대체 뭡니까. 왜 제가 사인검을 쥘 수 있었고, 왜 제가 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거죠? 저는 그냥… 평생 책만 파고든 평범한 학자일 뿐입니다.”
서화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월광석 빛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세상에는 두 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문자로 기록되어 눈에 보이는 역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이면, 결코 문자로는 남길 수 없는 거대한 힘의 흐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죠. 신물(神物)의 행방, 지맥(地脈)의 변화, 그리고 이 땅에 숨어 사는 이물(異物)들의 이야기… 그것이 진짜 역사입니다.”
그녀의 눈이 월광석 빛을 받아 녹색으로 빛나며 지운을 똑바로 꿰뚫었다.
“사인검을 다룰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 길을 열 수 있었던 것. 당신은 이 일과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기록자의 가문일 것입니다. 기록자의 가문은 대대로 그 ‘보이지 않는 역사’를 기록해온 자들입니다. 왕의 곁에서 이 땅의 지맥과 신물의 운명을 읽고, 그것을 특수한 방법으로 후세에 전해온 것. 그것이 바로 기록자의 숙명이었습니다.”
“…나의 가문이?”
지운은 숨이 막히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평생 유물에 본능적으로 끌리고,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한 유물의 ‘기억’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재능이나 직관이 아닙니다. 당신의 피 속에 잠들어 있던 힘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깨어난 겁니다."
지운은 숨이 거칠어졌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이성과 합리주의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심장은, 그의 피는, 서화의 말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첨벙.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발밑 물길 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물에 뛰어드는 듯한 소리가 났다. 완벽한 고요 속이었기에, 그 작은 파문 소리조차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서화가 월광석을 그쪽으로 비췄다. 녹색 빛이 창처럼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잔잔한 물 위에, 방금 전 무언가가 분명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증거인 원형 파문만이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물수제비가 뜬 것처럼, 파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통, 통, 튀며 멀어지고 있었다.
“화천회… 그들이 벌써 따라온 건가요?”
지운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닙니다.”
서화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지만, 그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은 이 길을 알지 못합니다. 설령 안다 해도, 들어올 자격이 없어요..”
그녀의 시선이 석굴 벽의 한쪽으로 향했다. 월광석 빛이 닿은 벽면에는, 물이끼가 없는 맨들맨들한 바위 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새긴 듯한 기이한 흔적이 보였다. 검붉게 변색된 이끼 사이로,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처럼, 그러나 지독한 원한을 담아 새겨놓은 듯한 한글 자음과 모음이 비틀린 채 새겨져 있었다.
『ㄱ…ㅐ…ㅇ…ㅑ…ㅁ…ㅣ』
지운은 저도 모르게, 학자의 본능으로 그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서체가 기이했다. 마치 손톱으로 파낸 것처럼, 모든 획의 끝이 날카롭게 갈라져 있었다.
“…개…얌…이…?”
“개얌이... 우리가 만났던 그것입니다.”
서화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늘게 떨리며 갈라졌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훔쳐 먹고 그 아이의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되고 사악한 것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귀물이 아니에요.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이름조차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치 그 이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석굴 전체가 낮게 진동했다.
우우우우웅-
그들이 들어온 석문 쪽 깊은 어둠 속에서, 차갑고 축축하게 젖은 숨소리가 안개처럼 번져 나왔다.
그리고…
…얼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 그러나 동시에 수백 명이 합창하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폐허 같은 어둠 속에서 명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은 마치, 이미 그들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길의 주인이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축가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