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검(四寅劍)
“길의 끝은 언제나 벽이지.”
노인의 목소리는 마른 석회가루를 긁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품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수백 년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모든 희망을 비웃는 절대적인 조롱이 가득했다. 그는 갇힌 쥐를 내려다보는 늙은 고양이처럼,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즐기는 듯 여유로웠다.
“왕이라 한들, 죽음 앞에서는 한낱 필부일 뿐. 하물며 왕의 흉내를 내는 너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의 발걸음은 소리가 없었지만, 그가 내딛는 공간마다 바닥의 검붉은 원념의 연기가 더욱 짙게 번져나갔다. 연기는 살아 있는 살점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발목을 감싸고, 뱀처럼 기어올라 해진 도포 자락에 스며들었다. 그가 지나온 자국은 게걸스럽게 삼켜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지옥의 군주가 자신의 영역을 넓히며, 현실 세계를 자신의 악몽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공간 자체가 그의 존재감에 짓눌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윤서화는 비틀거리면서도 지운의 앞을 막아섰다. 방금 전,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혈진(血陣)을 폭발시킨 대가로 그녀의 기운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감각,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무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녀의 어깨는 가쁘게 들썩였고,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백자(白磁)처럼 창백했다. 그럼에도 피 묻은 붓을 쥔 손은,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아직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의지력이었다. 마지막 남은 정신의 불꽃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한지운의 목소리는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떨렸지만, 그의 눈은 오히려 형형하게 빛나며 노인을 꿰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의 세포를 얼어붙게 만드는 와중에도, 진실을 파헤치려는 학자의 집요한 집념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알아야만 했다.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 거대한 악의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 내가 누구인지가 그리도 궁금한가, 젊은 학자여? 하하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웃음은, 오래된 비석이 혹한에 갈라질 때의 소리와 같았다. 그 웃음소리에 주변의 깨진 유물 파편들이 잘게 떨었다.
“나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슬픔이다. 왕에게 버림받고, 역사에서 지워진 모든 이들의 첫 번째 눈물이지. 너희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그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덮어쓴 거짓인지, 너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지운은 직감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이 자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세월의 비틀림 속에서 버려진 자들의 원념을 양식 삼아,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한 저주가 되어버린 괴물.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수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존재해 온 재앙. 화천회의 영수라는 직함은, 이 존재의 본질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이름이었다.
“지식을 향한 갈망은 훌륭하다. 허나 때로는 무지(無知)가 가장 안락한 축복이 되는 법이라네. 진실은 너 같은 필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니.”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자, 바닥의 연기가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수만 점 유물에 서려 있던 원념들이 비명과 함께 찢겨 나와, 검은 해일처럼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창의 형태가 아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들, 허공을 붙잡으려는 수천 개의 손, 부러진 칼날과 깨진 그릇의 형상이 뒤섞인 혼돈의 격류였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공기 자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제 그만, 그 지긋지긋한 호기심과 함께 영원히 쉬도록 하라.”
서화는 이를 악물고 남은 힘을 쥐어짜 붓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무리한 기력 소모로 눈가에는 핏줄이 터져 붉은 실핏줄이 번졌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결계를 다시 세우려는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노인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안 돼…”
지운의 눈동자가 거대한 절망으로 번져나갔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그때였다.
옆 선반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더러워지지 않은 한 줄기 은은한 기운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먼지 쌓인 유리 케이스 속.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낡은 한 자루의 검. 그러나 그 검신(劍身)에 새겨진 네 마리의 호랑이 문양을 본 순간, 지운은 숨을 멈췄다. 평생을 유물과 함께한 학자의 직관이, 뇌리에 박힌 지식이 확신을 외치고 있었다.
사인검(四寅劍). 호랑이의 해(寅年), 호랑이의 달(寅月), 호랑이의 날(寅日), 호랑이의 시(寅時). 네 겹의 인(寅)이 겹치는 기적 같은 찰나에만 주조할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양기(陽氣)를 품은 파사(破邪)의 검. 왕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하늘 아래 모든 사악한 것을 베기 위해 존재하는 검. 원념의 탁한 기운 속에서, 오직 그 검만이 스스로 빛을 머금은 듯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서화 씨!”
지운이 절박하게 외쳤다.
“저 검! 사인검입니다!”
서화는 그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을 끌어모아, 손에 쥔 피 묻은 붓을 유리 케이스로 힘껏 던졌다.
휘잉-
붓은 핏빛 안개를 흩뿌리며 날아가, 케이스의 낡은 강철 자물쇠를 정통으로 때렸다.
쨍그랑-!
그녀의 혈기가 담긴 일격에 자물쇠가 깨지며 케이스 문이 열렸다. 지운은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수백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사인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화르르륵-!
수만 볼트의 전류 같은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단순한 전기가 아니었다. 수백 년간 검 안에 응축되어 있던 태양의 열기, 살아 있는 불덩이가 그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크아아아악!”
지운은 비명을 토해냈다. 피부가 숯처럼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고, 혈관마다 용암이 흐르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의 피,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고 지켜온 ‘기록자’의 사명을 품은 그의 피가 사인검의 순수한 양기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고통 속에서, 그의 정신은 아득한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주인을 알아본 듯, 사인검이 금빛 울음을 토해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신수(神獸)의 포효처럼, 검신에서부터 폭발적인 금빛 파동이 흘러나왔다. 빛은 순식간에 수장고의 어둠을 갈라내며 퍼져나갔다. 지운과 서화를 덮치려던 검은 원념의 해일이, 그 신성한 빛에 닿는 순간 피를 토하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타올랐다. 마치 태양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어둠이 스스로 증발하듯, 비명과 함께 소멸했다.
“사… 사인검…?”
노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지워졌다. 그 자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당혹과,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분노가 스쳤다.
“네놈… 네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
그러나 지운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의식은 이미 다른 곳에 잠겨 있었다. 사인검을 쥔 순간, 수백 년의 시간이 압축된 정보의 홍수가 그의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뜨거운 불 앞에서 검을 단련하던 대장장이의 땀방울. 완성된 검을 받아 들고 고뇌하던 왕의 고독한 눈빛. 전장에서 이 검 아래 스러져간 적병들의 절규와, 검을 휘두르던 장수의 굳은 결의. 모든 기록과 기억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피부는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빛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의 눈동자는 녹아내린 황금처럼 타올랐다.
지운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의 팔을 빌려, 검이 스스로 움직였다. 사인검의 검끝은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제단 위에 놓인 기이한 형상의 ‘역십이지신상 동경(逆十二支神像 銅鏡)’을 겨누고 있었다. 그 거울이 이 모든 원념을 증폭시키고 통제하는 핵임을, 검이 알려주고 있었다.
“안 돼!”
노인의 절규가 수장고를 울렸다.
쉬이이이익-!
검격이 휘둘러졌다. 평생 붓만 잡아온 학자의 서툰 몸짓이 아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응축된, 완벽하고 무자비한 검술의 형상. 금빛 검기(劍氣)가 공간을 가르며 터져나갔다.
수장고를 지배하던 깊고 질긴 어둠이, 마침내 한 줄기 빛에 찢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