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길
“…찾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작은 파동은 공기 중에 섞인 먼지 하나하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절대적인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공간의 법칙을 뒤트는 권능의 선언이었다. 수장고를 가득 채우던, 수십 명 화천회 신도들의 기이하고 반복적인 주문이 그 순간, 예리한 칼날에 목이 베인 듯 뚝 끊어졌다. 소리만 멎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읊조리던 소리는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마치 검은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소멸했다.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시간마저 정지한 듯한,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수십 개의 공허한 눈동자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처럼, 오차 하나 없이 동시에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 영혼이 빨려 나간 듯한 그들의 시선은 마치 주인을 만난 사냥개처럼, 한지운과 윤서화가 몸을 숨긴 거대한 유물 선반 쪽을 정확히 가리켰다.
제단 위에 서 있던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만족감과 흉측한 조소가 기름처럼 번져나갔다. 그는 이 순간을, 이 절망적인 사냥의 시작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연출가와 같았다.
키득.
아이가 웃었다. 무덤의 문을 여는 낡은 경첩 소리 같기도, 혹은 잘 벼린 칼날끼리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한 기괴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 수장고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아이는 그저, 인형처럼 까닥, 하고 핏기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다.
콰콰콰콰쾅—!
지운과 서화가 몸을 숨겼던 거대한 철제 선반이,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아귀에 우그러드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쇠로 된 뼈대가 부러지는 굉음, 유물의 무게를 버티던 강철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수장고를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선반 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수백 점의 유물들이, 댐이 무너지듯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 왕조의 흥망을 지켜봤을 신라의 금관, 수많은 장인의 피땀이 서린 고려의 청자가 머리 위에서 산산조각 나며 역사의 파편을 비처럼 뿌렸다. 묵직한 청동검과 놋그릇들은 총알처럼 튀어 사방의 벽과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뜯겨 나갈 듯한 파편의 폭풍 속에서,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 하나가 지운의 팔뚝을 길게 그었다. 선명한 주홍빛 피가 번져 나왔다.
“피해!”
서화가 외침과 동시에 지운의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굴려, 간발의 차이로 무너져 내리는 강철과 역사의 더미를 피했다. 찰나 전까지 그들이 있던 공간은,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골과 가루가 된 역사의 잔해로 뒤덮인 무덤이 되어 있었다. 먼지와 함께 피어오르는 것은, 부서진 유물들 속에 잠들어 있던 희미한 원념의 입자들이었다.
키득… 키드득…
아이의 웃음소리가 돔 형태의 높은 천장에 메아리쳤다. 마치 이 모든 파괴를 즐기는 듯한, 순수한 악의가 담긴 소리였다. 그것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이번에는 다른 선반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선반 위 유물들이 일제히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검고 끈적한 기운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물건에 깃들어 잠들어 있던 원념(怨念)의 총체. 억울하게 죽은 자의 분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배신당한 자의 억울함, 잊혀진 자들의 저주가 검은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허공에서 서로 뒤엉키더니, 이내 길고 뾰족한 창의 형태로 응축되었다. 검은 연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수십, 수백 개의 검은 창끝이 일제히 두 사람을 겨누었다. 창의 끝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망자들의 속삭임, 그들의 마지막 단말마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쐐애애액-!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원념의 창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궤적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서화가 움직였다. 그녀는 품에서 손바닥만 한 단도(短刀)를 꺼내 들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왼 손바닥을 깊게 그었다. 선혈이 터져 나오자, 그녀는 피 흐르는 손으로 열차에서 보았던 그 붉은 털의 붓을 움켜쥐었다. 붓대가 살아있는 듯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자, 붓끝의 털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천부인(天符印)의 명으로 왕로(王路)를 여니, 만귀(萬鬼)는 퇴거(退去)하라!”
서화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필휘지로 혈서 같은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성한 인(印)의 형태였다. 하늘의 뜻을 대리하는 자만이 그릴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표식이었다.
획-
획-
붓끝이 바닥을 긋는 매 순간, 바닥 자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듯했다. 그녀의 생명력이 담긴 신성한 피와 망자들의 더러운 원념이 부딪히며 자잘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침내 마지막 획이 심장을 상징하는 중심부에 찍히는 순간,
파아아앗!
바닥에서부터 폭발적인 붉은 빛의 기둥이 치솟았다. 빛은 순식간에 반구(半球) 형태의 결계가 되어 두 사람을 감쌌다. 결계의 표면에는 그녀가 그린 문양이 금빛으로 떠올라 유영했다. 때맞춰 쇄도하던 검은 창들이 결계의 표면에 부딪히자, 마치 불길에 뛰어든 나방처럼 비명과 함께 검은 연기로 소멸했다.
쉭-
팟-! 팟!
수십 개의 창들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결계 밖에서, 아이가 천천히, 그리고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짝-
지극히 단순한 소리였지만, 그 파장은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되어 퍼져나갔다. 순간, 수장고 전체가 경련하듯 떨렸다. 제자리에 있던 모든 유물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검은 기운을 미친 듯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의 박수 소리가 잠들어 있던 모든 원념을 깨우는 기상나팔이라도 된 듯했다.
수만 개의 원념이 하나의 거대한 해일이 되어 붉은 결계를 두드렸다. 마치 댐을 부수려는 격류처럼, 원념의 파도가 결계를 잠식해 들어왔다.
콰지직! 콰드득!
결계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맑은 유리잔에 균열이 가듯, 붉은 빛의 막 위로 거미줄 같은 검은 금이 퍼져나갔다. 균열의 틈새로 원념의 검은 혀가 뱀처럼 파고들어, 안쪽의 신성한 공기를 오염시켰다. 결계 안으로 스며든 한기는 뼈를 시리게 만들었다.
“컥…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서화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곧 그녀의 생명력을 태우는 행위였다. 그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지운은 이를 악물며 주위를 살폈다. 해일처럼 덮치는 원념, 뒤엉킨 유물들의 비명, 망자들의 속삭임으로 가득 찬 공기.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몽이었다. 이대로는 끝장이다. 그의 눈이 필사적으로 허공을 헤집다, 문득 한곳에 멈췄다.
한 줄기 고요.
빛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둠이 없는 곳’.
수많은 선반들 사이, 오직 한 곳만이 유물들의 검은 기운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다른 원념들이 마치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그 주변을 피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역대 왕들의 옥새와 인장, 어보(御寶), 그리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품들이 보관된 선반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이 아닌, 국가의 질서와 하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들. 망자들의 혼돈 서린 원념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위엄과 질서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서화 씨!”
지운이 절박하게 외쳤다.
“저쪽입니다! 옥새가 있는 선반!”
서화가 그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눈이 지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눈에는 망설임 대신,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된 자의 차가운 결의가 서렸다.
"왕의 길이군요...준비해요!”
붓을 거꾸로, 마치 단검처럼 쥔 그녀의 눈동자가 결계의 빛처럼 붉게 번졌다.
“셋에 뜁니다.”
결계의 균열이 더욱 깊어지며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결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하나.”
붉은 빛이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둘.”
서화는 결계를 유지하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피 묻은 붓끝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 앞에 겨누었다.
“셋!”
그녀는 자신의 피와 기운을 모두 폭발적인 촉매로 쓰기 위해, 붓끝을 가슴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콰아아아아앙—!
붉은 결계가 밖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폭발했다. 서화의 생명력이 응축된 강력한 충격파가 붉은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닌, 정화의 빛이었다. 결계를 두드리던 원념의 해일이 그 파도에 정면으로 후려쳐져 뒤로 밀려났고, 그 여파에 휘말린 신도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지금!”
지운의 외침에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왕의 옥새가 놓인 선반 사이, 절대적 위엄이 흐르는 공간, ‘왕의 길’로.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적처럼 사방을 옥죄던 원념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사방의 검은 기운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왕의 위엄이 잡귀들의 발호를 억누른 것이다.
그러나 안도할 새도 없었다.
제단 위의 노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끌끌’ 하고 혀를 차며, 두 사람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걷고 있었지만,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왔다. 그의 발걸음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주변의 부서진 유물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가루가 되었다. 원념들이 그를 위해 스스로 길을 열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리석고 가련한 것들.”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수장고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왕의 길이라… 과연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고 가는가...”
그가 천천히 손을 들자, 두 사람이 달려가는 길 저편의 복도 끝. 육중한 강철문이 단두대처럼 비명을 지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쿠궁-!
쐐액-!
쿵!
묵직한 쇠가 바닥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최후의 퇴로가 막혔다. 두 사람은 왕의 유물들이 늘어선 선반의 미로 속에 완벽하게 갇혔다. 등 뒤에서는 절대적인 악의를 품은 노인이 다가오고, 앞은 강철로 막혔으며, 사방에서는 퇴로를 막고 다시 모여드는 원념들이 검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왕의 길은, 그들을 위한 무덤의 입구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