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것들
수장고 안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아니, 무덤보다 더했다.
무덤은 적어도 평화가 있고 죽은 자들이 편히 쉬는 곳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곳은 죽은 자들이 강제로 깨워진 곳이었다. 천장까지 치솟은 철제 선반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15미터 높이의 선반들. 녹슨 선반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선반들이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수만 점의 유물들이 관 속의 시신처럼 차갑게 잠들어 있었다. 각 유물은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된 특수 보관용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각 시대의 토기들이 울고 있었다. 토기의 균열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천 년 동안 말라 있던 토기에서 물이 흘렀다. 그 물은 눈물이었다. 토기를 만든 사람의 눈물. 토기를 사용한 사람의 눈물. 토기와 함께 묻힌 사람의 눈물.
자비로운 미소를 띤 불상들의 그 미소는 뒤틀려 있었다.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썹이 찌푸려져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불상의 눈에서 피가 흘렀다. 조각된 돌눈에서 실제 피가. 붉고 따뜻한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자기가 있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천 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품들. 하지만 표면에 금이 가고 있었다. 미세한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그 균열이 문자를 이루고 있었다. 한자였다. 원(怨). 한(恨). 고(苦). 원한과 한탄과 고통의 문자들.
고서화가 있었다. 종이와 비단에 그려진 그림들.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하지만 그림이 변하고 있었다. 산수화의 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인물화의 사람이 썩어가고 있었다. 화조화의 새가 죽어가고 있었다. 먹이 번지고 있었다. 천 년 동안 고정되어 있던 먹이 흘러내렸다. 그림이 녹아내렸다.
수천 년의 시간이 압축된 공간이었다. 각 유물마다 수백, 수천 년의 역사. 왕조의 흥망성쇠.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모든 인간사가 물건에 응축되어 있었다. 죽은 자들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유물을 만든 장인의 숨결. 유물을 사용한 주인의 숨결. 유물과 함께 묻힌 망자의 숨결. 그 숨결들이 지금 강제로 깨워지고 있었다.
지운과 서화는 거대한 선반 뒤에 몸을 숨겼다. 선반이 그들을 가려주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선반 사이로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보였다. 저편, 수장고 중앙에는 선반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만들어진 원형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광란의 의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옷을 걸친 수십 명의 화천회의 신도들이 원형으로 둘러서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생명력이 연료가 되어 타고 있었다. 수명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몇몇은 이미...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다. 주름이 생겼다. 이가 빠졌다. 실시간으로 노화하고 있었다. 원의 중심에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광화문에서 보았던 그 존재. 화천회의 수장.
그 앞에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역십이지신상 동경이 놓여 있었다. 거울은 변해 있었다. 더 이상 푸른빛이 아니라, 피 처럼 검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거울이 심장처럼 요동쳤다.
둥. 둥. 둥.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의 형상을 한 '그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완전한 실체가 있었다. 그것은 까만 머리카락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관절이 반대로 꺾였다. 인간의 춤이 아니었다. 곤충의 춤 같았다. 거미가 춤추는 것 같았다. 그것은 즐겁다는 듯 신도들 사이를 오갔다. 신도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그들의 생명력이 빨려나가면서 한 명씩 쓰러졌다.
"…얼쑤."
주변 선반에 놓인 유물 보관함들이 흔들렸다. 각 유물이 제자리에서 떨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깨어나려는 것처럼. 지운은 그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움직이면 들킬 것 같았다.
그때, 그것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하지만 손톱이 너무 길었다. 10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손톱. 한쪽 선반을 가리켰다. 삼국시대의 토기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토기가 스스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 같은 금이었지만, 그 금은 점점 커졌다. 깨진 틈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하지만 아지랑이보다 훨씬 짙고 끈적했다. 그 연기는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연기로 된 뱀이 공중을 헤엄쳐,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이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연기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 갔다.
"…저것…"
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속삭임이었다. 지운의 귀에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유물에 깃든 원념을 먹고 있어요."
원념. 원한의 념. 집착의 정신.
"죽은 자들의 기억, 분노, 슬픔."
그녀가 설명했다.
"그 모든 잔재를 제물로 삼아, 힘을 키우는 겁니다."
제물. 그 순간 지운은 깨달았다. 이 수장고 전체가 거대한 제물이었다. 수만 점의 유물. 각각이 하나의 제물.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물 하나하나가. 원래는 고요히 잠든 망자의 기억을 간직한 껍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감정이 강제로 찢겨 깨어나고 있었다. 봉인이 풀리고 있었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하고 있었다. 악의로 변환되고 있었다. 원한이 증오로. 슬픔이 저주로. 그리움이 집착으로. 지운은 학자로서 알고 있었다. 10여년 간 박물관에서 일하며 만진 유물들. 각각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저 유물 하나하나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의 칼.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의병장의 검. 마지막 순간까지 쥐고 있었던 검. 피가 굳어 있는 검. 그 검에는 적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버림받은 후궁의 장신구.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의 비녀. 독약을 숨겨둔 비녀. 자결할 때 사용한 비녀. 그 비녀에는 배신감과 절망이 스며 있었다.
굶어 죽은 아이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 흉년에 죽은 아이와 함께 묻힌 토기. 빈 토기. 음식 대신 흙을 담았던 토기. 그 토기에는 배고픔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학살당한 마을의 제기. 몽골 침입 때 전멸한 마을의 제사 도구. 피로 물든 제기. 마지막 제사를 지낸 제기. 그 제기에는 공포와 한이 배어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신하의 인장. 모함으로 죽은 정승의 도장. 유언장에 찍힌 마지막 도장. 피로 찍은 도장. 그 도장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모든 사연.수만 개의 사연들. 한 맺힌 목소리들이 지금 여기서 하나의 거대한 울부짖음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꽈앙!
또 다른 유물이 깨졌다. 고려청자였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명품.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릇일 뿐이었다. 원념을 담은 그릇. 깨진 청자에서 더 많은 연기가 나왔다. 이번에는 형체가 있었다. 사람 형상이었다. 청자를 만든 도공의 형상. 그가 울부짖었다. 소리 없는 절규. 그리고 그도 아이에게 흡수됐다.
퍽! 퍽! 퍽!
연쇄적으로 유물들이 깨졌다. 도미노처럼. 하나가 깨지면 옆의 것도 깨졌다.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 울부짖음은 아이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지운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왔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공포를 넘어선 무언가. 존재 자체가 거부하는 감각이었다.
"신기는… 어디 있습니까."
지운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성대가 마비된 것 같았다. 겨우 소리를 냈다.
"원의 중심."
서화가 턱짓으로 백발 노인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징이 있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하지만 그것은 지운이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변해 있었다. 본래의 모습은 평화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사유하는 자세.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운 미소. 자비와 구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소가 뒤틀려 있었다.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귀까지 찢어진 입. 조롱하는 듯한 웃음. 인간의 고통을 비웃는 듯한 웃음.
"…저 반가사유상이 신기입니까?"
"아니요."
서화가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릇입니다. 신기를 담는 그릇."
그녀의 시선이 반가사유상의 이마로 이동했다. 두 눈썹 사이. 제3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 본래 투명해야 할 수정의 백호(白毫).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석. 그것은 지금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투명한 수정이 피처럼 붉었다.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맥박이 있었다.
둥. 둥. 둥.
수정이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진짜 신기는 저 안에 있습니다."
서화가 말했다.
"화천회는 유물의 원념을 제물로 삼아..."
그녀가 설명했다.
"신기의 봉인을 풀고 있는 겁니다."
봉인. 천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봉인. 이제 그것이 풀리려 하고 있었다. 금이 가고 있었다. 백호의 수정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미세한 금. 하지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춤을 추던 아이가 멈췄다. 한 발을 든 채로. 균형을 잃을 것 같은 자세로. 하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바닥에 끌렸다. 머리카락이 뱀처럼 꿈틀거렸다가 멎었다. 완전한 정지.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이 180도 회전했다. 몸은 그대로인데 머리만 돌았다. 찢어진 입이 활처럼 휘어졌다. 웃었다. 그것의 시선이 움직였다. 정확히 지운과 서화가 숨어 있는 선반을 향했다.선반 뒤를 꿰뚫어보는 시선이었다.
"…찾았다."
차갑고 건조한 속삭임이, 마치 바로 귓속에서 울린 듯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