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滅)의 잔상
"…바루 …땡 …인경 …땡 …삼경(三更) 전에 …꼬꾸마… 떴다………암행어사 ……출두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무언가였다.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음역대. 골도 전도와 공기 전도가 동시에 일어나는 불가능한 소리. 고막을 우회해 직접 뇌간에 침투하는 진동. 맑지도, 유희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저주였다. 천 년 묵은 원한이 응축된 독.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악의. 죽어서도 풀리지 않은 한(恨)의 결정체. 쇠못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뇌수에 박혔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운은 분명히 느꼈다. 날카로운 금속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회백질을 파고드는 감각.
지운은 숨이 막혔다. 문자 그대로 막혔다. 폐가 얼어붙어, 들숨도 날숨도 허락되지 않았다. 폐포가 얼음 결정으로 변했다. 날카로운 결정들이 폐 조직을 안에서부터 찢었다. 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기관지까지 얼어 있었다. 산소가 부족했다. 뇌세포가 하나둘 죽어갔다. 시야가 흐려졌다. 의식이 멀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각이 열렸다. 죽음의 감각. 죽은 자들이 보는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목을 졸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손이었다. 작고 차가운 손. 어린아이의 손. 하지만 힘은 성인 남자보다 강했다. 그 다음은 두 손. 목 양옆을 잡았다. 경동맥을 눌렀다. 혈류가 차단됐다. 뇌로 가는 피가 막혔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점점 많은 손들이 나타났다. 목뿐만 아니라 가슴을, 팔을, 다리를 잡았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손들에 붙잡혔다.
그것들은 모두 작은 손이었다. 아이들의 손. 하지만 온도가 달랐다. 어떤 손은 얼음같이 차갑고, 어떤 손은 불같이 뜨거웠다. 어떤 손은 썩어서 물렁했고, 어떤 손은 뼈만 남아 있었다.
박물관 보존실에서 마주쳤던 그 존재. 기괴하게 꺾인 관절과, 유리 위에 찍힌 작은 손자국. 그것이 지금, 이 밀폐된 열차 안에 함께 있었다. 아니, 그것'들'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존재들이 열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열차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온도계가 있었다면 터졌을 것이다. 영하 40도, 50도, 60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추위. 좌석에 앉은 먼지가 순식간에 습기를 머금었다. 아니, 습기가 아니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어 미세한 얼음 결정이 됐다. 그것들이 먼지와 섞여 진득한 슬러시가 됐다. 그 슬러시가 움직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형태를 만들려 했다. 작은 손, 작은 발, 작은 얼굴...축축이 가라앉았고, 창문에는 얼음꽃 같은 성에가 피어올랐다.
"어디… 어디에…."
지운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여러 겹으로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들이 그의 성대를 빌려 말하고 있었다. 눈은 미쳐버린 듯 열차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눈이 따로 움직였다. 왼쪽 눈은 위를, 오른쪽 눈은 아래를 봤다. 사시가 된 것이 아니었다. 각 눈이 다른 존재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건 없었다. 정확히는, 너무 많이 보였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 보였다. 유령들, 원혼들, 잔류사념들... 열차가 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끔찍했다. 그들 너머, 더 깊은 어둠 속에 진짜가 있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그것. 텅 빈 공간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은신처였다. 빈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것이 공간 자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찰칵-
그때, 발밑 바닥에서 미묘한 금속음이 울렸다. 지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이 변하고 있었다. 금속 바닥이 살점처럼 물렁해졌다. 맥박이 느껴졌다. 거대한 생물의 뱃속 같았다. 차가운 금속 바닥 틈새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다. 처음에는 하나였다. 작은 손바닥이 기어 나왔다. 유리창에 찍혔던 그것과 똑같은, 어린아이의 손. 하지만 색이 달랐다. 창백한 백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이었다. 피부가 벗겨져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점점 많은 손들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모두 크기가 달랐다. 갓난아기의 손부터 열 살 아이의 손까지. 그들이 모두 지운을 향해 뻗어졌다.
"보려고 하지 마세요."
서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공포가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이미 늦어버렸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려 해도 감을 수 없었다. 눈꺼풀이 투명해진 것처럼, 감아도 다 보였다. 검은 바닥을 헤집고 나온 건, 팔이었다. 하나의 팔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팔이 서로 꼬여 있었다. 마치 밧줄처럼. 작은 팔들이 DNA 나선처럼 꼬여 하나의 큰 팔을 이루고 있었다. 관절은 반대로 꺾여 있었다. 팔꿈치가 바깥쪽으로 꺾였다. 손목이 360도 돌아가 있었다. 손가락이 손등 쪽으로 젖혀져 있었다. 살결은 얼음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그 아래 혈관은 검붉게 부풀어 있었다. 피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기름처럼 끈적한 검은 액체. 그것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꿈치로. 실로 꿰맨 인형처럼 덜렁거리는 손목. 정확히는 실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으로 꿰매어져 있었다. 그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움찔거리는 손가락. 각 손가락이 따로 움직였다. 마치 각자 다른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슥-
갑자기 팔이 튀어 올랐다. 스프링처럼. 압축되어 있던 것이 갑자기 펴진 것처럼.
"꼭꼭 숨어서... 머리터럭... 보인다."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입이 없었다. 팔뚝의 피부가 갈라지며 그곳에서 소리가 나왔다. 피부로 만든 입. 차가운 손이 바닥을 짚었다.
쩍-
바닥이 갈라졌다. 손가락이 금속 바닥을 종이처럼 찢었다. 그리고 그 손이 지운의 발목을 붙잡았다. 잡는 것이 아니었다. 침투했다. 손가락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물리적 장벽이 의미가 없었다. 살과 뼈를 관통해 신경을 직접 움켜쥐었다. 얼음장 같은 감각이 살결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그것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숨이 막혔다. 기도가 얼어붙었다. 성대가 마비됐다. 횡격막이 경직됐다. 심장이 얼어붙으며, 그 박동조차 멎어가는 듯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빈맥과 서맥이 번갈아 나타났다. 심실세동이 시작됐다. 이대로 가면 심정지가 올 것이다.
"…네 숨소리… 들린다… "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귓가가 아니었다. 고막 안쪽에서 들렸다. 내이에서 직접 진동이 발생했다.
"..................네 그림자… 밟았다…"
소리는 스피커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운의 척추 안쪽에서 직접 울렸다. 척수를 타고 올라온 진동이었다. 뇌간에서 대뇌피질로 퍼졌다. 모든 신경세포가 그 진동에 공명했다. 뼛속에서 흘러나온 속삭임이었다. 골수에서 생성된 소리. 그것이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턱이 탈구될 정도로.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발목을 잡은 그 작은 손이 점점 더 위로 기어올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점점 많은 손들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정강이로. 피부 아래로 파고들었다. 근육 섬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신경을 건드렸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다리가 마비됐다.
온몸의 열기가 뽑혀 나가고 있었다. 체온이 1도씩 떨어졌다. 36도, 35도, 34도...저체온증이 왔다. 의식이 흐려졌다.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추위. 극한의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그 순간,
"보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어둠을 찢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이중, 삼중으로 울렸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여러 존재가 그녀의 목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붓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허공에 첫 획을 그었다.
슥-
공기가 베였다. 문자 그대로 베였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검은 선이 남았다. 공간에 상처가 났다. 그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아니, 피가 아니었다. 더 검고 끈적한 무언가. 먹물도 종이도 없었지만, 붓끝이 지나간 자리는 갈라졌다. 현실의 표면이 찢어졌다. 그 아래 다른 층이 드러났다. 더 깊고 어두운 현실의 이면. 붓이 지나가는 순간마다 열차 안의 그림자들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그림자들이 물러났다. 서화의 붓을 피해 구석으로 움츠러들었다. 마치 그 붓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무기인 것처럼.
획-.
첫 번째 획. 세로로 길게 그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음에서 양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획-.
두 번째 획. 가로로 짧게 그었다. 동에서 서로. 과거에서 미래로. 시작에서 끝으로.
획-.
세 번째 획.
대각선으로 그었다. 모서리를 깎았다. 균형을 맞췄다. 조화를 이뤘다.
서화의 손놀림은 망설임이 없었다. 수천 번은 반복해온 의식처럼, 완벽하고 정확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런데 그 땀이 붉은색이었다. 피땀이었다.
이 주술을 쓰는 대가. 생명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마지막 획이 끝났다.
화악-!
허공에서 붉은 불꽃이 솟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다. 온도가 없는 불. 열은 없지만 모든 것을 태우는 불. 영혼을 연료로 하는 불. 그 불꽃이 한 글자를 이뤘다.
『滅』
멸할 멸.
그 글자가 공중에 떠올랐다. 크기가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했지만, 금세 사람 크기가 됐다. 글자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회전하면서 주변의 모든 어둠을 빨아들였다. 붉은 글자가 불타며 열차 안에 잔광을 뿌렸다. 그 빛은 평범한 빛이 아니었다. 정화의 빛. 모든 사악한 것을 태우는 빛. 죽은 것을 죽음으로 돌려보내는 빛. 그 빛이 지운의 발목을 움켜쥔 손에 닿았다.
치익-
살이 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살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타고 있었다. 그것을 이 세계에 묶어두던 집착이 타고 있었다. 피부가 녹아내리듯 손은 비명을 지르며 후퇴했다.
키이이이익-!
손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백 년 묵은 원귀의 절규였다. 손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형체만 흩어졌을 뿐, 존재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잔광 속에서 지운은 보았다. 열차 끝 칸, 출입문 앞. 그곳에, 무언가 서 있었다. 작은 아이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비율이 이상했다. 머리가 너무 컸다. 몸의 절반이 머리였다.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목이 비정상적으로 굵었다. 머리카락은 바닥을 끌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다녔다. 각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따로 움직였다.
키이이이이-
소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래된 철문이 녹슬어 스스로 무너지는 소리. 금속과 금속이 긁히는 소리. 하지만 그 안에 리듬이 있었다. 음악적 구조가 있었다. 저주의 선율. 살아 있는 존재가 낼 수 없는 파열음. 아이의 형상은 붉은 잔광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장난감을 관찰하듯. 호기심이 가득한 동작이었지만, 그 호기심은 순수하지 않았다.
"이 열차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위를 달립니다."
서화가 붓을 움켜쥔 채,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쳤다. 피땀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붉은 줄기가 목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붓을 쥔 손에서 연기가 났다. 살이 타고 있었다. 그 붓을 사용하는 대가...
"가끔, 길을 잃은 것들이 올라타기도 하죠."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저거… 박물관에 있던…."
지운이 겨우 말을 꺼냈다. 성대가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쉰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그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잔상일 뿐."
잔상. 그 단어가 나오자 아이의 형상이 반응했다. 키득키득 웃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로 동시에.
"진짜는 이미 '그곳'에 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아이의 형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졌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 아래 새로운 피부가 있었다. 더 창백하고 더 매끈한. 그리고 그 피부도 다시 벗겨졌다. 계속해서 껍질을 벗었다. 점점 작아졌다. 아이에서 유아로, 유아에서 태아로.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연기처럼 스르르. 하지만 냄새는 남았다. 썩은 양수 냄새. 죽은 채로 태어난 아이의 냄새. 노랫소리도 멎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열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감속이 느껴졌다. 관성이 몸을 앞으로 밀었다. 현실의 물리법칙이 돌아왔다. 창밖 암흑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점이었다. 작은 빛의 점들. 점점 가까워지며 선이 됐다. 형광등의 줄. 승강장의 조명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서화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서 있었다.
끼이이익-
열차가 멈춰 섰다. 완전한 정지. 더 이상의 진동도, 소음도 없었다. 출입문이 열렸다.
치익-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열차 안보다는 따뜻했다. 인간의 세계의 공기였다. 문 밖은 승강장이었다. 텅 빈 승강장. 광화문역과는 달랐다. 더 깨끗하고, 더 새것 같았다.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이 지나치게 깨끗한 공간. 아니면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것 같았다. 타일은 거울처럼 빛났다. 천장의 조명이 바닥에 완벽하게 반사됐다. 상하가 대칭을 이뤘다. 벽은 하얬다. 병원처럼. 모든 것이 소독된 것 같은 하얀색. 박물관과 직접 연결된, 비상시에만 열리는 특수 승강장. 일반인은 존재조차 모르는 곳. 정부 요인과 국보급 유물의 긴급 대피를 위해 만들어진 비밀 통로.
"내려요."
서화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운은 잠시 망설였다. 열차가 더 안전한 것 같았다. 적어도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었다. 유령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가 한 발을 내디뎠다. 발이 승강장에 닿는 순간, 전기 충격 같은 것이 올라왔다. 이곳도 경계였다. 완전한 산 자의 세계도, 완전한 죽은 자의 세계도 아닌.
"화천회는… 왜 하필 박물관입니까?"
지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몸 속 깊은 곳이 얼어 있었다.
"그곳에 '신기(神器)'가 있기 때문이죠."
서화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 두려움이 있었다.
"역십이지신상 동경은 문을 여는 열쇠일 뿐.
진짜 목적은 그 안에 잠든 신기입니다."
신기.
그 단어가 나오자 승강장의 조명이 깜빡였다.
"신기…?"
"나라를 세우거나, 멸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물건."
서화가 설명했다.
"단군의 천부인. 해모수의 용광검. 박혁거세의 알. 그런 것들."
신화 속 물건들.
"그런 게 실재합니까?"
그녀가 벽을 짚으며 걸었다.
"화천회는 그것으로 죽은 신을 현세에 부르려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처음으로 위기감이 묻어났다. 떨림이 있었다. 공포가 있었다.
"그것이 깨어나면…"
그녀가 말을 멈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서울은 거대한 제물이 됩니다."
지운은 목이 바짝 말라 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까슬까슬했다. 이성은 부정하고 싶었다. 미친 소리라고. 망상이라고. 정신병자들의 헛소리라고. 하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그가 본 것들, 겪은 것들이 모두 실재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재앙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발을 내딛자, 승강장의 바닥이 차갑게 울렸다.
치이익-
뒤에서 문이 닫혔다. 유령열차의 문이었다. 열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불빛이 멀어졌다. 점이 되었다가 사라졌다. 완전한 어둠이 터널을 채웠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고요한 승강장 위에 남겨졌다.
저 위, 지상에는 그들이 막아야 할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