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집
유령열차가 사라진 승강장은 죽음처럼 고요했다. 아니, 죽음보다 더 고요했다. 죽음에는 적어도 끝이 있다. 하지만 이 고요함은 영원할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아니, 시간이 죽은 듯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흐름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투명한 젤리를 삼키는 것 같았다. 폐가 저항했다. 이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소음이 차단됐다. 완벽한 방음. 하지만 단순히 소리가 막힌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차원이었다. 도시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헉. 헉. 헉.
그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증폭됐다. 왜곡됐다. 벽이 소리를 흡수하는 대신 반사했다. 그것도 여러 번. 메아리가 메아리를 낳았다.
"이곳은…."
지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공기가 너무 건조했다. 아니, 건조한 것이 아니라 수분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알던 박물관의 지하와는 달랐다. 완전히 달랐다. 구조는 같았다. 벽의 위치, 천장의 높이, 바닥의 재질. 모든 것이 도면과 일치했다. 하지만 본질이 달랐다. 마치 똑같이 생긴 쌍둥이 중 하나가 죽어서 시체가 된 것 같았다. 형태는 같지만 생명이 없는. 관람객이 결코 발을 들이지 않는 공간. 금지구역이었다. 일반인은 존재조차 모르는 곳. 직원들도 특별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곳. 국가 최고 수준의 보안이 설치된 심장부.
카메라가 사각지대 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동작 감지 센서가 1밀리미터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적외선 그물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꺼져 있었다. 센서가 반응하지 않았다. 적외선이 보이지 않았다. 전원이 나간 것이 아니었다. 전기는 들어오고 있었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보안 시스템만 선택적으로 마비됐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낯설고 비현실적이었다. 벽의 색이 달랐다. 분명 흰색이어야 했는데, 희미하게 노란빛이 돌았다. 오래된 뼈의 색깔 같았다. 천장에 얼룩이 있었다. 물 얼룩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형태가 있었다.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뒤틀린 손 같기도 했다. 바닥이 기울어져 있었다. 미세하게. 육안으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몸은 느꼈다. 균형이 맞지 않았다.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곰팡이 냄새. 하지만 일반적인 곰팡이가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냄새. 무덤의 곰팡이 같은. 서화는 말없이 승강장 끝에 서 있는 육중한 철문을 가리켰다.
그 문은 거대했다. 높이 3미터, 폭 2미터. 두께는 30센티미터는 될 것 같았다. 탱크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재질이 특별했다. 일반 강철이 아니었다. 표면에 푸른빛이 돌았다. 티타늄 합금? 아니면 더 특수한 금속?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언뜻 보면 장식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한자였다. 봉(封). 인(印). 금(禁). 폐(閉). 봉인과 금지의 문자들. 지문과 홍채, 이중으로 잠겨야 하는 보안문. 최첨단 생체인식 시스템이었다. 지문, 홍채, 그리고 DNA까지 확인하는 삼중 잠금장치. 열쇠로는 열 수 없었다. 오직 등록된 사람만이. 그것도 극소수만이 열 수 있는 문이었다.
하지만 문은 10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사람이 간신히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너비. 계산된 것 같았다. 초대하는 것 같았다.
"보안 시스템이…."
지운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말을 하다가 멈췄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그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서화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더 깊고, 더 어두웠다. 마치 다른 존재가 그녀의 목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물리적 장벽은 소용없어요."
그녀가 열린 문틈에 다가갔다.
"그들은 벽을 뚫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 움직이니까요."
그녀가 문틈을 통과했다. 지운도 뒤를 따랐다. 문 너머는 길고 하얀 복도였다. 5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너무나도 깨끗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먼지 한 톨 없었다. 얼룩 하나 없었다. 스크래치 하나 없었다. 마치 방금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아니,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오래됐다. 천 년은 된 것 같은 고색.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모순이었다. 새것이면서 낡은 것.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알코올과 포르말린이 섞인 냄새. 병원 냄새. 시체 보관소 냄새. 하지만 그 냄새마저 희미하게 낯설게 변질되어 있었다.
차가운 알코올 향 사이로,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래된 흙내. 천 년 묵은 무덤의 흙.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지하의 흙.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부식토.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가자 피를 말린 듯한 비릿한 냄새가 혀끝에 걸렸다. 피 냄새였다.
양옆으로는 수장고로 향하는 작은 철문들이 도열해 있었다. 문이 너무 많았다. 10개, 20개, 30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복도가 길어질수록 문도 늘어났다. 하나하나가 강철 금고처럼 무겁고 단단했다. 은행 금고 수준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핵 대피소의 문 같았다. 각 문마다 번호가 있었다. 하지만 일련번호가 아니었다. 규칙이 없었다. 7, 23, 108, 666...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 그리고 문마다 다른 표시가 있었다. 어떤 문에는 붉은 X. 어떤 문에는 검은 원. 어떤 문에는 알 수 없는 기호. 경고 표시 같았다. 위험 등급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지운은 그 문들이 모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문이 눈이었다. 각 문의 손잡이가 동공처럼 보였다. 그것들이 그를 추적했다.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따라왔다. 문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긁는 소리. 두드리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안에 갇힌 무언가가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수만 점의 유물이 잠들어 있었다. 국보, 보물, 그리고 비공개 유물들.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특수 소장품들. 역사의 잔해였다. 깨진 토기, 녹슨 칼, 썩은 천... 과거의 파편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물건이었다. 그것들을 만든 사람, 사용한 사람, 소유한 사람... 모두 죽었다. 그들의 손때가, 숨결이, 영혼이 물건에 스며 있었다.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각 유물마다 수백, 수천의 기억.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그리고 죽음의 순간의 기억도. 죽은자들의 집.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수만 명의 영혼이 물건에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지운은 문 너머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선이 느껴졌다. 차갑고, 텅 빈, 생명이 없는 시선들. 깨어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죽은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방인을 노려보는 눈빛. 경계와 적의.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갈망이었다. 살아있는 자를 향한 갈망.
"조심하세요."
서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으로 그녀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경고가 아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확인하라는 선언 같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시작됐다는 선언. 복도의 중간쯤 도달했다. 거기에는 텅 비어 있는 보안요원 초소가 있었다. 3평 정도의 작은 공간. 방탄유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의자가 넘어져 있었다. 급하게 일어선 것 같았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책상 위에 모니터가 줄지어 있었다. 12개의 모니터. 각각 다른 구역을 비추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전원은 모두 꺼져 있었다. 11개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화면이 검었다. 전원 LED도 꺼져 있었다. 책상 위 한 구석에는 종이컵에 커피가 담겨 있었다.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다. 5분? 10분?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은 없었다.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지운이 삼킨 침과 함께 물었다.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목이 너무 말랐다.
"잠들었을 겁니다."
서화가 대답했다.
"아주 깊은 잠을."
그녀가 유일하게 켜져 있는 모니터 하나를 가리켰다. 12번 모니터. 그것만 켜져 있었다. 희미하게. 화면이 깜빡거렸다. 그곳에는 노이즈 가득한 복도의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정적 노이즈였다.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검고 하얀 점들. 하지만 그 노이즈에 패턴이 있었다.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중심을 향해 회전하고 있었다. 텅 빈 듯 보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지나온 그 복도였다.
화면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 같은 무언가. 처음에는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자치고는 너무 진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바람에 흔들리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바람은 없었다. 복도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그 머리카락은 카메라가 잡지 못하는 리듬으로 움직였다. 프레임 사이로 미끄러졌다. 1초에 30프레임인 영상에서, 그것은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존재했다. 가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창백한 피부. 그리고... 입? 영상 속 어둠에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면서 나타난 존재.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
지운은 모니터를 애써 외면했다. 보면 안 된다는 본능이 작동했다. 너무 오래 보면 그것과 연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외면할수록, 다른 것이 보였다. 자신들의 그림자였다. 복도에서 그림자가 이상하게 늘어나 있었다. 미묘하게 길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광원은 천장의 형광등이었다. 그림자는 짧아야 했다. 하지만 3미터는 넘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혼자 움직였다. 본체는 가만히 있는데 그림자만 꿈틀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림자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그림자 끝에 무언가 달라붙어 있었다. 작고 검은 손들. 그것들이 그림자를 붙잡고 늘이고 있었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가는 것도 두려웠다.
복도 끝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목적지가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대형 수장고.
"신기(神器)는… 저 안에..."
서화는 대답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거울이었다. 손바닥만 한 옥경(玉鏡). 흰 옥으로 깎아 만든 거울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옥이 아니었다. 반투명했다. 안이 들여다보였다. 그 안에 무언가 갇혀 있었다. 붉은 실 같은 것이 옥 속에서 꿈틀거렸다. 거울 표면은 매끈했다. 너무 매끈해서 반사가 되지 않았다. 빛을 흡수했다. 테두리에 문양이 있었다. 팔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팔괘가 아니었다. 선이 끊어지고 이어진 곳이 반대였다. 역팔괘였다. 그녀가 그것을 문틈에 비췄다. 거울을 들어 문 안쪽을 비췄다. 일반적인 반사가 아니었다. 현실이 아닌 다른 것이 비쳤다. 매끈한 옥 표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물결이 일었다. 고체인 옥에 물결이. 그리고 그 물결이 가라앉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피로 쓴 것 같은 붉은 글씨. 그것도 방금 쓴 것처럼 젖어 있었다.
『生門은 닫히고』
생문. 삶의 문.
『死門이 열린다.』
사문. 죽음의 문.
글씨가 번졌다. 피가 번지듯이. 글자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이미 늦었습니다."
서화의 목소리에 절망이 서렸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떨렸다. 처음으로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의식이… 시작됐습니다."
의식. 그 단어가 나오자 문 안에서 반응이 왔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진동이 강해졌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장고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문이었다. 화천회의 노인이 읊던 것과 똑같은 고대의 주문. 하지만 언어를 알 수 없었다. 한자도 아니고, 산스크리트도 아니었다. 더 오래된 언어. 인류 이전의 언어. 그러나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읊조리고 있었다.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노인 목소리, 아이 목소리... 모든 연령대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불길한 합창이었다. 화음이 있었다. 하지만 불협화음이었다. 듣는 것만으로 정신이 갈라질 것 같은 소리. 낮은 음과 높은 음이 동시에 울렸다. 인간의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음역대였다. 초저주파와 초고주파가 동시에. 벽과 천장을 갈라놓는 듯했다. 실제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소리의 진동으로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지운은 그 울림에 신체가 반응하는 걸 느꼈다. 고막이 아닌 내장이 떨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웃음소리였다.
…얼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맑은 웃음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쁨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열차에서 보았던 잔상이 아니었다. 실체였다. 진짜가 여기 있었다.
지운과 서화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고.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다.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앞으로 가거나, 여기서 죽거나. 두 사람은 결심한 듯,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린 사문(死門) 너머로 발을 들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이미 시작된 의식의 심장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