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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9화

유령열차

by 돌부처

피할 곳은 없었다.

전조등 불빛 두 개가, 죽음의 눈동자처럼 터널의 어둠을 찢고 다가왔다.


그 불빛은 단순히 빛이 아니었다. 바위처럼 무게를 지닌 괴물의 시선이었다. 물리적 압력을 가진 빛. 닿는 것마다 짓누르고, 뭉개고, 분쇄하는 힘을 지닌 광선. 빛이 가까워질수록 중력이 강해졌다.


열차가 20미터 앞까지 왔다. 전면부가 보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전동차가 아니었다. 차체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검은 금속 비늘. 그것들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살아있었다. 전조등은 눈이 아니라, 눈구멍이었다. 거대한 두개골의 빈 눈구멍. 그 안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범퍼는 이빨이었다. 날카로운 금속 이빨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그것들이 서로 맞물리며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10미터.


열차의 속도가 줄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했다.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집어삼키려는 듯이.


5미터.


지운은 반사적으로 서화의 앞을 막아섰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이었을까. 그가 팔을 벌려 그녀를 감쌌다. 충돌의 순간을 대비했다. 눈을 감았다.


3미터.

2미터.

1미터.

끼이이이이이이이익-!


고막을 찢는 듯한 쇳소리가 폭발했다. 그것은 단순한 브레이크 소리가 아니었다.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레일이 휘어지고, 바퀴가 녹아내리고, 시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터널 전체가 갈라지는 듯한 파열음. 콘크리트가 균열되었다.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졌다. 벽이 안으로 휘어졌다. 마치 거대한 손이 터널을 쥐어짜는 것처럼. 철이 뜯기며 내는 금속 비린내. 그것은 피 냄새와 섞여 있었다. 오래전 이 선로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 그것이 금속에 스며들어 영원히 남아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숨결이었다. 열차의 숨결. 거대한 금속 생명체가 내뿜는 숨. 그 속에는 기름 냄새와 녹 냄새,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눈이 따가울 만큼 강렬한 바람이었다. 각막이 마를 것 같았다. 눈물이 증발했다. 속눈썹이 타는 냄새가 났다.


열차는 두 사람의 코앞, 불과 한 뼘 거리를 남겨두고 멈췄다. 그 거리가 생과 사의 경계였다. 지운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폐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심장도 멈춘 것 같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떴다. 전조등의 빛이 눈동자를 관통했다.


치이이이익-


오래된 기계가 신음을 토하듯, 출입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속 짐승이 먹이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는 것. 문틈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내부가 드러났다. 텅 비어 있었다. 기관사도, 승객도 없었다.


"타요."


서화가 지운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떨림이 없었다. 마치 이런 광경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어서!"


서화가 먼저 열차에 올랐다. 그녀가 문턱을 넘는 순간, 열차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환영받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아니면 오랜 친구를 알아본 것처럼.

지운은 망설였다. 모든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들어가지 말라고. 저것은 함정이라고. 한 번 타면 영원히 내릴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쿵! 투두두둑!


뒤에서 엄청난 충격이 왔다. 파수견이 따라잡은 것이었다. 괴물의 거대한 몸통이 터널 벽에 부딪쳤다. 콘크리트가 부서졌다. 그리고 벽에서 쏟아져 나온 군집 생물들. 수천 마리의 지네 괴물들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의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운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열차에 뛰어올랐다. 발이 차체에 닿는 순간, 전기 충격 같은 것이 전신을 관통했다. 차갑고도 뜨거운 감각.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한 모순된 느낌. 이 열차가 두 세계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쾅!


파수견이 출입문에 부딪혔다. 꿈틀대는 검은 형체들이 끈적한 체액을 흘리며 창문을 긁었다. 타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유리를 타고 흘렀다. 유리를 긁는 소리가 영혼을 긁는 것 같았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금이 퍼져나갔다.


치이익-


문이 닫혔다. 열차가 자신의 의지로 문을 닫은 것이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바깥의 소리가 차단됐다. 완벽한 방음.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 열차는 현실과 분리된 공간이었다. 독립된 차원이었다.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가속이 느껴지지 않았다. 관성도 없었다.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바퀴가 선로를 구르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공중에 떠서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창밖을 보니 레일이 보이지 않았다. 터널 벽도 없었다. 그저 완전한 어둠만이 있었다. 어둠에 빨려 들어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슈우우우...


마치 거대한 생물의 목구멍을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 지운은 무릎이 풀려 좌석 위로 주저앉았다. 좌석에 앉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수십, 수백 명이 이 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엉덩이를 통해 전해졌다. 그들의 공포, 절망, 체념이 좌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식은땀이었다. 체온을 빼앗아가는 차가운 땀. 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불쾌하고 끈적했다. 손바닥은 진득하게 미끌거렸다. 피인지 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숨이 목구멍에서 턱턱 걸렸다.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폐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건… 도대체 뭡니까…?"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울렸다. 빈 차내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메아리가 이상했다. 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서화가 창밖의 암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유령열차."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교과서를 읽듯 담담했다.


"혹은, 용차(龍車)라고도 불립니다."

"용차…?"


지운은 멍하니 되뇌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방금 전의 공포가 아직도 신경계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 노선은 단순한 편의 시설이 아닙니다."


서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 안에 별들이 빛나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은하수처럼 작은 빛들이 그녀의 홍채에서 소용돌이쳤다.


"오래전부터 이 땅에 흐르던 거대한 용맥(龍脈)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졌죠."


용맥. 지운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땅의 기운.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에너지의 맥.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입니다."


서화가 말을 이었다.


"진실은 더 깊은 곳에 있어요. 이 도시 아래에는 거대한 존재가 잠들어 있습니다. 용이라고 부르는 것. 지하철 노선은 그 존재의 혈관을 따라 만들어진 겁니다."

"그게 무슨..."

"이 열차는 그 맥을 따라 달립니다."


서화가 손을 들어 차체를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에서 푸른 빛이 일었다. 문양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용의 비늘 무늬였다.


"지도에도, 시간표에도 없는 열차입니다.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 누구를 위한..."

"경계를 넘나드는 자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있는 자들. 그리고..."


그녀가 지운을 보았다.


"문을 열 운명을 가진 자들."


지운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야 차내가 제대로 보였다. 분명 지하철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동차가 아니었다. 더 오래된 무언가였다. 손잡이는 반짝이는 놋쇠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놋쇠가 아니었다. 표면에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용의 비늘, 봉황의 깃털, 그리고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 손잡이를 잡으면 따뜻했다.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좌석은 자줏빛 벨벳으로 덮여 있었다. 오래된 극장의 흔적 같은 고풍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천에도 문양이 짜여 있었다. 실로 수놓은 것이 아니었다. 천 자체가 문양이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이 보였다. 때로는 용, 때로는 해골, 때로는 미로. 창문 구석마다 낡아 바랜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먹으로 쓴 한자들. 하지만 일반적인 부적과는 달랐다. 불길한 기운이 은은하게 흘렀다. 그것들은 무언가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열차 안에 갇힌 존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천장을 보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옛날 사찰의 단청처럼 화려한 그림. 하지만 내용이 이상했다. 사람들이 구멍으로 떨어지는 그림. 그 구멍 아래는 거대한 입이 벌려져 있었다. 수천 개의 이빨을 가진 괴물의 입. 그리고 그 옆에는 반대 그림이 있었다. 구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그림. 그것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없었다. 대신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닥에는 선로가 그려져 있었다. 아니, 새겨져 있었다. 금속 바닥에 깊게 파인 홈. 그것이 복잡한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 아니었다. 더 복잡하고 더 오래된 무언가. 이 도시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길들.


"당신은… 처음부터 이걸 알고 있었군요."


지운의 목소리는 의심 반, 체념 반이었다. 배신감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따져봤자 소용없었다.


"모든 길에는 지름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서화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열차는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퀴 소리도, 철이 부딪히는 진동도 없었다. 일반적인 전동차라면 덜컹거리는 소리, 레일 이음새를 지날 때의 충격, 커브를 돌 때의 원심력... 그런 것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은 여전히 완전한 어둠이었다. 도시의 흔적도, 터널의 콘크리트도 사라졌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 같은 암흑만이 창밖에 깔려 있었다. 가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빛나는 눈들. 거대한 촉수. 떠다니는 건물 조각. 뒤집힌 다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이 열차가 달리는 곳은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모든 경계가 흐릿한 곳.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지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적지를 알아야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천회가 다음 '문'을 열 곳."


서화는 품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양피지처럼 보이는 누런 종이. 모서리가 타들어가 있었고, 곳곳에 검은 얼룩이 있었다. 피 자국 같기도 하고, 그을음 같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보았던 그 기이한 지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보였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현대 지도가 아닌, 용의 척추처럼 휘어진 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꿈틀거렸다. 살아있는 뱀처럼. 지도 위를 기어 다녔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균열은, 맥을 따라 흐릅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점을 눌렀다. 손가락이 닿자 그 점이 붉게 빛났다. 맥박처럼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이 선을 따라 퍼져나갔다.


"그리고 가장 약한 곳에서 다시 터져 나오죠."


선이 뻗어나가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그곳은 특별히 밝게 빛났다. 붉은색을 넘어 검붉은색으로. 마치 피가 뭉친 것처럼. 지운의 시선이 그 점에 닿자, 숨이 막혔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 거기 적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그곳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청동거울이 보관되어 있던 곳. 그리고 그가 매일 출근하던 곳.


"정확히는, 그 지하 수장고."


서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긴장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가 잠들어 있는 곳."


과거. 그 단어가 묘하게 울렸다. 단순히 시간적 개념이 아닌 것 같았다.


"유물들 말입니까?"

"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기억을 담고 있어요. 수천, 수만 명의 사념이 깃들어 있죠."


서화가 설명했다.


"왕의 도장에는 권력의 잔향이. 장군의 칼에는 살의가. 무녀의 방울에는 주술이. 그 모든 것들이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요?"

"죽은 자들의 힘이 가장 강한 자리입니다.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


지운은 소름이 돋았다. 그가 매일 일하던 곳이 그런 곳이었다니.


"그들이… 박물관을 노린다고요?"

"이미 시작됐을 겁니다."


서화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화천회는 준비된 자들입니다. 광화문은 미끼였을 뿐. 진짜 목표는 처음부터 박물관이었어요."

"왜 하필..."

"그곳에는 광화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열쇠'가 잠들어 있으니까요."


열쇠. 또 그 단어였다.


"청동거울 말고 열쇠가 또 있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퍽-


열차 안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창밖의 어둠과 차내의 어둠이 하나가 됐다. 경계가 사라졌다. 안과 밖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창밖의 암흑이 차내로 스며들었다. 아니, 스며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쏟아져 들어왔다. 물처럼, 아니 그보다 더 짙은 무언가처럼. 어둠이 폐로 들어왔다. 차갑고 끈적했다. 타르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너무 조용했다. 모든 소리가 어둠에 흡수된 것처럼 심장 소리도,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지직-


천장의 스피커에서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잡음이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치지직... 지지지직...


하지만 점점 패턴이 생겼다. 리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잡음 사이로 목소리가 섞였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속삭임이었다.

누군가 아주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소리.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그 어떤 인간의 언어도 아니었다. 더 오래된 무언가. 인류가 언어를 만들기 전에 사용하던 소리들. 그리고 그 속삭임 사이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맑고 높은 목소리. 동요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수백 년 묵은 원한과 한기가 서려 있었다.


온도가 떨어졌다. 급격히. 입김이 하얗게 나올 정도로. 차창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바루… 땡…"


단어들이 끊어져 들렸다. 옛날 노래 같았다. 전래동요? 아니, 더 오래된 무언가.


"인경… 땡…"


인경. 새벽 3시를 뜻하는 옛말. 귀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간.


"삼경(三更) 전에…"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꼬꾸마… 떴다……"

"…암행어사……출두야……"


갑자기 온도가 더 떨어졌다. 창문에 얼음 결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문양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손바닥 자국이었다. 작은 손바닥. 어린아이의 손. 그것이 창문 안쪽에서 찍혀 있었다.


하나, 둘, 셋...점점 늘어났다. 창문 전체가 작은 손바닥 자국으로 뒤덮였다. 지운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나타났던 '그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어린아이의 손자국을 남겼던 존재. 그것이 이 열차에, 지금 이 순간 함께 타고 있었다.


"오빠..."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 노래가 아니었다. 말이었다. 그리고 한국어였다.


"오빠... 나 여기 있어..."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일곱 살? 여덟 살? 너무 어렸다.


"춥다... 너무 추워..."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추워하는 것 같았다. 도움을 구하는 것 같았다.


"나 좀 도와줘... 오빠..."


지운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려 했다.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린아이가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서화가 그의 팔을 잡았다.


"속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것은 아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정말로 들어보세요."


지운은 귀를 기울였다. 그제야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소리들.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겹쳐져 있었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들의 목소리도. 그들이 모두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도와줘..."

"살려줘..."

"나가고 싶어..."

"배고파..."

"아파..."


그리고 그 모든 목소리 아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낮고 음산한 웃음. 그것이 이 모든 목소리를 조종하고 있었다. 미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낚시를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동정심을 미끼로 영혼을 낚는 낚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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