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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8화

지하의 맥(脈)

by 돌부처

마지막 형광등이 죽어가는 심장처럼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각 깜빡임 사이의 간격이 죽음을 앞둔 환자의 불규칙한 호흡처럼 점점 길어졌다. 그러다 불빛은 한순간 살아나듯 치올랐다. 필라멘트가 타오르며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열 배는 밝게 빛났다. 눈이 멀 정도로 하얀 섬광. 그 빛 속에서 지운은 보았다. 승강장 전체가 변해 있었다. 타일은 살점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벽은 숨을 쉬듯 부풀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천장에는 거대한 혈관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붉고 검은 액체가 그 안을 흐르고 있었다.


치지직-


전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떨어졌다. 파편들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암흑이었다. 완전한 암흑.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승강장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능동적으로 공간을 점령한 것이었다. 거대한 포식자가 먹이를 삼키듯, 어둠이 현실을 삼켜버렸다.


지운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호흡을 내뱉는 순간, 어둠이 코와 입으로 흘러들어올 것 같았다. 이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무게를 지닌 존재였다. 피부 위로 깔리며 근육을 짓누르고, 허파를 바위처럼 눌렀다. 한 겹의 차가운 솜이 코와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키는 것 같았다. 고막이 먹먹하고, 위아래가 뒤섞여 방향 감각이 사라졌다.


콰드득!


계단 위에서 결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지운의 뼛속을 후벼팠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과 그 뒤를 이어, 분노에 찬 짐승의 포효가 들렸다.


이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무게를 지닌 존재였다. 물리적 질량을 가진 어둠. 중력을 왜곡시키는 어둠. 시공간을 구부러뜨리는 어둠. 피부 위로 깔렸다. 처음에는 얇은 막처럼. 그 다음은 두꺼운 담요처럼. 마침내는 납덩이처럼. 어둠이 층층이 쌓여 그를 짓눌렀다. 근육을 짓눌렀다. 움직이려 해도 어둠의 저항이 느껴졌다. 마치 타르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 팔을 들기 위해 평소의 열 배는 되는 힘이 필요했다. 허파를 바위처럼 눌렀다. 숨쉬기가 고통스러웠다. 갈비뼈가 삐걱거렸다. 횡격막이 경련했다. 산소가 부족했다. 아니, 산소는 있었지만 어둠과 섞여 있어서 제대로 흡수되지 않았다.


한 겹의 차가운 솜이 코와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키는 것 같았다. 더 정확히는, 어둠이 그의 호흡기관을 침범하고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성대를 마비시켰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숨소리만으로도 그 거대한 형체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크어어어어억!


그것은 소리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존재 자체의 절규. 순수한 분노의 물질화. 그 포효가 공기를 찢고, 콘크리트를 갈라뜨리고, 현실을 뒤흔들었다.

지운의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귀에서 뭔가 따뜻한 것이 흘렀다. 피인지, 뇌척수액인지, 아니면 영혼의 일부인지. 공간 자체가 포효에 울려 퍼져, 콘크리트 기둥이 파동을 따라 떨렸다.


흡-


들숨. 승강장의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진공 상태가 됐다. 지운의 폐가 쪼그라들었다. 안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후-


날숨.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유황 냄새와 썩은 고기 냄새, 그리고 더 끔찍한 무언가의 냄새. 그 바람에 피부가 벗겨질 것 같았다.


공간 자체가 포효에 울려 퍼졌다. 콘크리트 기둥이 파동을 따라 떨렸다. 미세한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눈처럼 떨어졌다.


‘온다.’


지운의 등줄기를 따라 얼음장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공포는 이성을 녹여냈다. 문자 그대로 녹였다. 기억이 지워지고, 논리가 무너지고, 자아가 흐릿해졌다. 단 하나의 사실만이 남았다. 죽음이 곧 닿는다는 사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어둠 속에서 서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바로 옆에서 들려왔지만, 동시에 수십 미터 떨어진 터널 저편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깝고도 멀었다.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어둠은 소리마저 왜곡하고 있었다. 음파가 직진하지 못했다. 나선형으로 꼬이며 전달됐다. 그래서 한 문장이 여러 겹으로 들렸다. 과거의 목소리와 현재의 목소리가 섞였다.


"이쪽으로쪽으로로로..."


메아리가 아니었다. 시간차를 두고 도착하는 같은 소리였다. 마치 그녀가 여러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가 지운의 손목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 그 차가움만이 지금 지운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는 단서였다.


“어딜… 어떻게….”


지운의 목소리는 공포로 터져나왔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어둠이 성대를 조여 오고 있었다.


“눈이 없어도 길은 있습니다. 발밑의 흐름을 느끼세요.”


서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한 사람처럼 어둠 속 승강장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너무 부드러웠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떠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어둠 속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지운은 맹인처럼 그녀의 손에 매달려 발을 옮겼다. 노란색 안전선이 발바닥에 스치며 지나갔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선의 감촉만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한 발 한 발이 모험이었다. 다음 발을 디딜 곳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바닥이 갑자기 사라질지도, 무언가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쿵! 쿵! 쿵! 쿵!


뒤에서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무겁고 빠른 네 발의 리듬. 파수견이 냄새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 육중한 무게가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며, 뼛속까지 울렸다. 지운의 심장이 그 리듬에 동기화되듯 쿵쿵 뛰었다.


“선로로 내려갈꺼에요.”


서화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미쳤어요? 거기는..."

“이곳은 이미 죽은 공간이에요. 하지만 저 아래에는 아직 살아 있는 맥(脈)이 흐릅니다.”


그녀가 몸을 던지듯 승강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운도 따라 몸을 내던졌다. 발목이 축축한 자갈에 빠져 움찔했다. 자갈이 아니었다. 썩은 물, 기름, 그리고 정체 모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더 부드럽고, 더 끈적했다. 발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발목까지 빠져들었다. 늪 같았다. 하지만 늪보다 더 짙고, 더 끈적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 마치 거대한 생물의 체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썩은 물, 기름, 그리고 정체 모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단순한 악취가 아니었다. 시간의 냄새였다. 수십 년간 쌓인 도시의 찌꺼기. 자살한 사람들의 피.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체액. 그 모든 것이 섞여 발효된 냄새. 그리고 그 속에 더 오래된 냄새가 있었다. 이 도시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무언가의 냄새. 땅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존재의 냄새.


크르르릉…


바로 등 뒤, 승강장 위에서 괴물의 울음이 흘러나왔다. 파수견이 선로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지운은 본능적으로 손에 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잠금 화면이 켜졌다. 희미한 빛이지만 이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횃불처럼 밝았다. 손전등 버튼을 눌렀다.


팟-.


LED 불빛이 터널의 암흑을 가르며 번쩍였다. 빛이 닿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났다. 마치 생물이 고통스러워하며 움츠러드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증발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터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 서화의 절규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안돼!”


빛이 닿은 그 순간, 승강장 위의 괴물 모습이 드러났다. 지운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혔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 상상한 괴물의 범주를 넘어섰다. 광장에서 피어 오른 검붉은 연기를 먹어치운 탓에, 몸집은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피부는 부풀어 오르고 갈라져, 속에서 솟구친 살점이 종양처럼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부풀어 오른 부분마다 붉은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수십 개의 눈.


그 모든 눈이 동시에 지운을 응시했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빛이 비춘 터널 벽. 그곳에는 얼룩이나 곰팡이 같은 검은 덩어리들이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빛이 닿는 순간, 그것들이 꿈틀거렸다.


스스스스슥-


벽에 붙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오며 수백, 수천 개의 다리를 내밀었다. 지네와 거머리의 중간 같은 형체. 길게 찢어진 입에서 흰 이빨들이 들쑥날쑥 드러났다. 그들은 빛을 향해,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다리가 자갈을 긁는 소리는, 뼛속을 갉아먹는 소름으로 번졌다.


“빛은… 그것들을 부릅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떨렸다.


“어둠 속에서만 사는 것들입니다. 빛은 그들에게 먹이의 신호입니다.”


먹이의 신호. 그들은 빛을 먹었다. 아니, 빛을 내는 존재를 먹었다. 그리고 지금 유일한 광원은 지운의 스마트폰이었다.


키에에엑!


승강장 위의 파수견이 빛을 보고 더욱 흥분했다. 육중한 몸이 자갈 위로 떨어지며, 선로 전체가 진동했다. 쇳조각들이 튀어 오르며 불꽃이 흩날렸다.


“이쪽으로! 빨리!”


서화가 지운을 강하게 잡아끌며 반대편 터널로 뛰었다. 지운은 공포에 질려 손전등을 끄지 못했다. 그의 빛줄기를 따라, 벽에 붙어 있던 검은 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뒤에서는 파수견이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양옆에서는 정체 모를 그것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앞뒤, 좌우. 사방이 막혔다. 완벽한 죽음의 덫.


그때였다. 터널 깊숙한 곳에서 땅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둠을 찢고 불빛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길 위를 따라 마주 오는 거대한 눈처럼, 두 개의 원형 불빛이 미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쇠와 쇠가 부딪히며 울리는 끔찍한 마찰음과 터널 벽이 울릴 정도의 괴성에 지운은 눈을 크게 떴다. 막차가 끊긴 지 오래인데,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지하철 한 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분명히 선로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빛을 먹고, 어둠을 찢으며. 마치 죽은 도시의 맥박이 마지막으로 뛴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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