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기
강화(江華)의 새벽은 피와 안개가 자욱했다.
1247년 고려, 몽고의 5차 침입.
몽고군의 쇠뇌(弩)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찢어지는 바람 소리를 내며 고려 병사들의 목책 위로 쏟아졌다.
“제5열, 방패를 올려라! 활을 당겨라!”
별초(別抄) 부대의 젊은 교위(校尉), 강치우는 쉰 목소리로 외치며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의 갑옷은 이미 몇 군데가 찌그러져 있었고, 투구 아래로 땀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그는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파수꾼. 길을 지키는 자‘ 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았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단순한 전장의 살기(殺氣)가 아니었다. 몽고군의 잔혹함 너머에,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검고 끈적한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기운은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더 많은 피와 절망을 갈망하며 춤추는 듯했다.
‘놈들이다.’
치우는 이를 악물었다. 파수꾼 가문 내에서 ‘재회도(, 災灰徒)’라 불리는 자들. 그들은 전쟁이나 역병처럼 거대한 재앙의 그늘에 숨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원념을 제물로 삼아 세상의 균형에 균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교위님! 동쪽 방책이 뚫렸습니다!”
부하의 절규에 치우는 정신을 차렸다. 몽고군 기병대가 무너진 방책 사이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선두에는 몽고인도, 고려인도 아닌 기괴한 차림의 사내들이 있었다. 온몸에 잿빛 가루를 뒤집어쓴 채, 희번덕이는 눈으로 전장을 훑는 자들. 재회도였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확자’였다.
“치우야!”
그때, 치우의 상관이자 같은 파수꾼인 백선(百選) 장군, 윤현(尹玄)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노장의 눈은 재회도를 향한 깊은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저놈들이 노리는 건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강화도 지맥의 중심, 참성단(塹星壇)을 더럽히려는 것이다.”
참성단.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성지.
야사(野史)에 따르면, 그곳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었다. 고려의 국운과 이 땅의 정기를 지키는 거대한 ‘결(界)’의 중심점이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죽은 자들의 원혼을 역류시켜 참성단의 결계를 깨려는 속셈이다. 그리되면 강화는 무너지고, 고려의 숨통은 끊어진다.”
“어찌해야 합니까, 장군님.”
“가거라. 내가 놈들의 우두머리를 막는 동안, 너는 참성단으로 가야 한다.”
윤현은 품에서 손바닥만한 청동 거울을 꺼내 치우에게 건넸다. 단순한 거울이 아니었다. 하늘의 뜻을 담았다는 세 개의 신물, 천부인(天符印) 중 하나인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의 형태를 본뜬 ‘수호경(守護鏡)’이었다.
“참성단 정상의 제단에 이 거울을 올려놓아라. 그러면 최소한 반 시진(半 時辰)은 결계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내가 저놈들을 처리하겠다.”
“장군님!”
“이것은 명령이다! 우리는 길을 지키는 자. 잊지마라!“
윤현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몽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칼은 전장을 누비는 장군의 것이었지만, 왼손에 쥔 부적들은 파수꾼의 비술을 펼치고 있었다.
치우는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까지는 험준한 산길. 그리고 그를 막아서는 몽고군과 재회도의 무리. 살아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윤현 장군과 고려군이 싸우는 곳을 멀리 돌아서, 전투 없이 빠르게 참성단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마니산으로 향하는 길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치우는 별초의 직위를 이용해 병사 몇을 이끌고 방어선을 뚫었지만, 산 초입에 들어서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몽고군이 아닌 섬뜩한 광경이었다.
나무마다 목을 맨 시체들이 걸려 있었다. 몽고군 복장을 한 자도, 고려군 복장을 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한 표정, 그리고 가슴팍에 재로 그린 기괴한 문양.
“이, 이건…”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것들은 놈들이 펼친 환술(幻術)이다!”
치우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병사 하나의 눈이 흐리멍덩해지더니, 갑자기 동료에게 칼을 휘둘렀다. 숲 전체가 죽은 자들의 원념으로 가득 차, 산 자의 정신을 좀먹는 ‘귀역(鬼域)’으로 변해 있었다.
“크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치우는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선명한 고통이 재회도의 환술을 몰아냈다. 그는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허공에 ‘파(破)’ 자를 썼다.
“균형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라!”
파수꾼의 피와 의지가 담긴 혈인이 빛을 발하며 퍼져나가자, 병사들을 괴롭히던 환영이 잠시 걷혔다.
“모두 정신 차려라!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내 발자국만 따라와라!”
치우는 병사들을 이끌고 귀역의 중심을 향해 달렸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작은 공터에 이르자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 옷을 입은 재회도 하나가 부서진 불상 앞에 앉아, 시체에서 뽑아낸 머리카락으로 만든 실을 엮으며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가 원념을 증폭시켜 숲 전체를 환술에 빠뜨린 것이었다.
“네놈!”
치우가 칼을 들고 달려들자, 재회도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수꾼의 냄새가 나는구나. 하지만 너무 늦었다. 너희의 발버둥침이 곧 우리 신의 강림을 위한 최고의 제물이 될 테니.”
재회도는 품에서 해골로 만든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며, 흙과 나뭇가지로 뒤엉킨 거대한 형상이 솟아올랐다. 숲의 원념을 뭉쳐 만든 토귀(土鬼)였다.
치우는 병사들에게 물러서라 소리치고 토귀를 정면으로 상대했다. 칼로 베어도 금세 흙과 나무가 엉겨 붙어 상처가 아물었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지맥의 흐름을 베어야 한다!’
치우는 눈을 감고 땅의 기운을 읽었다. 숲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토귀에게 공급하는 지맥의 흐름이 보였다. 그는 토귀의 육중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흐름의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콰직!
칼은 땅에 깊숙이 박혔다. 치우는 칼자루에 수호경을 올려놓고 남은 기력을 모두 끌어모아 외쳤다.
“만물은 순환하고, 흐름은 제자리로! 정(正)!”
수호경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땅속으로 정화의 기운을 쏟아부었다. 지맥의 흐름이 역류하며 토귀에게 공급되던 원념이 끊겼다. 거대한 흙 인형은 힘을 잃고 먼지처럼 무너져 내렸다.
재회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치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칼이 재회도의 심장을 꿰뚫었다.
“…신께서… 보실 것이다…”
재회도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한 줌의 재로 변해 흩어졌다. 귀역은 사라졌지만, 치우는 병사 대부분을 잃었다. 그는 남은 두 명의 병사와 함께,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참성단을 향해 달렸다. 시간이 너무 지체 되었다.
참성단 정상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치우가 도착했을 때, 이미 제단 주변은 몽고군과 재회도 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재회도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파수꾼인가? 어리구나.”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의 스승은 제법이었지만, 여기까지다. 이 땅의 원념이 곧 우리 신의 눈을 뜨게 할 것이야.”
치우는 수호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파수꾼이 하나라도 살아있는 한, 너희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
“어리석구나.”
사내가 손짓하자, 재회도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치우는 남은 병사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맞섰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가 참성단을 가득 메웠다.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나갔다. 치우 역시 온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치우는 적의 칼에 어깨를 베이면서도, 이를 악물고 제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남아있던 마지막 병사가 자신의 몸으로 몽고군의 창을 막아서며 치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치우는 눈물을 삼키며 제단 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제단의 차가운 돌에 닿는 순간, 거구의 사내가 그의 등을 칼로 깊숙이 찔렀다.
“크윽…!”
엄청난 고통이 온몸을 꿰뚫었지만, 치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피 묻은 손으로 수호경을 제단 중앙의 홈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찼다.
수호경은 하늘의 태양을 모두 빨아들인 듯 눈부신 빛을 뿜어냈고, 참성단 전체에 새겨져 있던 보이지 않는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문양들이 땅에서 솟아올라 하늘로 이어지며 거대한 빛의 장벽을 만들었다.
“이… 이럴 수가!”
재회도의 우두머리가 경악했다. 빛의 장벽은 강화도 전체에 퍼져 있던 죽음의 기운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울려 퍼지던 원혼들의 비명이 잦아들고, 끈적한 어둠의 기운이 햇빛 아래 눈 녹듯 사라졌다.
“네놈… 네놈의 생명력까지 태운 것이냐…!”
사내의 외침을 뒤로하고, 치우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치우가 눈을 뜬 곳은 작은 암자였다.
등에는 끔찍한 상처가 남았지만, 목숨은 건졌다. 윤현 장군도, 그를 따르던 병사들도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은 고려의 패배로 끝났다. 강화는 함락되었고, 고려는 몽고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역사에는 ‘강화 함락’이라는 네 글자만 기록될 뿐이었다.
하지만 치우는 알고 있었다. 그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또 다른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는 졌지만, 파수꾼은 세상을 지켜냈다는 것을.
그는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암자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고려의 하늘이었고, 땅은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치우는 품 안에 남은 수호경을 꺼내 들었다.
거울은 빛을 잃고 평범한 청동 거울처럼 보였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 잠든 스승과 동료들의 숭고한 희생을.
그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몽고에 끝까지 항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는 삼별초의 행렬이 눈에 보였다.
길을 지키는 자.
파수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왕조는 무너지고 역사는 바뀔지라도, 세상의 균형을 지키려는 그들의 맹세는 시간의 풍파 속에서 더욱 단단해질 터였다. 치우는 거울을 품에 단단히 고쳐 묶고, 남쪽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