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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6화

화천회(化天會)

by 돌부처

헤드라이트가 한꺼번에 켜지는 순간,

광장은 잠깐 낮처럼 환해졌다가 곧바로 물속처럼 어두워졌다.


빛이 어둠을 가르는 게 아니라, 어둠이 빛을 잘라 먹는 느낌이었다.소리도 따라 꺼졌다. 엔진이 분명히 돌아가고 있을 텐데, 금속이 공기를 미는 특유의 울림이 들리지 않았다.


검은 세단 세 대가 그림자와 같은 속도로 미끄러지듯 다가와 광장 가장자리에 나란히 멈췄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차체의 윤곽을 비췄지만, 그 반사 위에는 별의 개수처럼 작은 점들이 떠 있었다. 지운은 한참 뒤에야 그것이 가로등 잔광이 아니라, 차체 표면에서 스스로 솟는 미세한 불꽃임을 알아차렸다.


차문들이 동시에 열렸다. 안에서 나온 남자들은 베어 낸 나무 단면처럼 매끈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옷에는 구김이 없었다. 움직일 때도 구겨지지 않았다.그들의 보폭은 모두 같았고, 발뒤꿈치가 바닥을 치는 각도마저 동일했다. 누가 앞장서라거나, 눈짓으로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막대기로 그들을 한 번에 밀어 배치한 것처럼, 순식간에 원 둘레에 빈틈 없이 서 있었다.


지운은 그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표정이 없다기보다, 표정을 붙일 자리가 비어 있는 듯했다. 눈, 코, 입은 있었지만, 그 형상들은 각자의 얼굴에 붙은 부품처럼 느껴졌다.


가운데에 선 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양복이 아닌 회색 코트. 값비싼 천이었지만, 빛을 반사하는 대신 먼지처럼 흩뿌렸다.남자는 백발이 성성했지만 노쇠의 느낌은 없었다. 그의 등뼈는 활처럼 팽팽했고, 어깨는 한 치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차갑다”로는 설명이 모자랐다.

손을 넣으면 얼음이 아니라 유리 가루가 만져질 것 같은, 파삭거리는 냉기.


그가 시선을 옮길 때마다, 유리가 아주 미세하게 금이 갈 때 나는 가느다란 비명처럼, 주변 공기에서 아주 작은 파열음이 났다.

.

노인이 손을 들었다. 뼈마디가 피부를 안에서 밀어 올린 듯 선명했다. 곧바로 측면에 선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가 건낸 것은 나무 상자였다. 상자 표면에는 오랜 세월을 견딘 수지의 윤기가 스며 있었고, 모서리마다 같은 간격으로 못이 박혀 있었다. 지운은 역십이지신상 동경이 들어 있던 그 상자임을 알아차렸다.


“저들입니까. 당신이 말한 ‘진짜 손님’이.”


지운이 속삭였을 때, 그의 말소리는 입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기가 말의 형태를 흡수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옆에서 여자가 방울을 더 꽉 쥐었다. 붉은 실이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다. 방울 안에서 아주 얇게 쇳소리가 고였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노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얼음이 아니라 칼날 같았다.


노인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경첩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자 속에서 청동 거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늬가 있는 면이 아니라, 거울의 등면이 먼저 빛을 받았다. 녹청색이 아니었다. 흩뿌린 초록빛. 초록이라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물이 아니라 피가 산화하며 만들어낸 녹 같았다.


표면이 숨을 쉬듯 미세하게 팽창하고 수축했다. 노인이 거울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받쳐 들자, 조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거울면에서 빛이 솟았다. 광장이 환해진 것이 아니라, 지운의 눈 안쪽에서 빛이 켜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마치 거울이 ‘보는 쪽’을 선택하는 듯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파수견들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점들만 보였던 짐승들이, 일제히 배를 바닥에 붙이고 꼬리를 내렸다. 낮은 으르렁임이 단숨에 끊겼다. 그 소리는 공기 중에서 끊긴 게 아니라, 목 안에서 손으로 목줄을 잡아당긴 듯 멎었다. 왕을 맞는 짐승의 자세. 그러나 그 경외는 공포와 다르지 않았다. 그것들은 두려워해 엎드렸지만, 동시에 목울대를 바닥에 비벼 자신의 냄새를 남겼다. 소유의 표시. 복종과 점유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여자의 숨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화천회(化天會).”


그 이름이 혀끝에서 떨어졌다.


“하늘의 뜻을 바꾸려는 자들.”


이름은 간단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의지가 간단할 리 없었다. 지운은 문장 자체보다, 여자가 그 이름을 그리 낮게 저주하듯 발음하는 소리에 몸이 굳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말 같지 않은 말이었다.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되지 않는 음들, 숨과 혀가 따로 논 뒤에 다시 합쳐지는 소리. 지운은 그것이 ‘외국어’가 아니라 ‘옛것’임을 즉시 알았다. 문법이 아니라 리듬으로 움직이는 음성. 그 리듬은 귀에서 시작해 혀 밑으로, 목 뒤로, 그리고 흉골 안쪽으로 박혔다. 심장이 그 리듬을 따라 조금씩 박자를 바꾸었다. 박동이 거울의 숨과 겹쳤다. 노인의 언어는 소리이면서 장치였다. 들으면 작동하는, 듣는 자의 안쪽을 재배열하는.


거울면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파동은 시각이 아니라 촉각이었다. 빛이 피부 위로 떨어져 미세하게 살갗을 돋게 했다. 지운은 팔에 잔털이 서는 것을 느꼈다.

한 가닥 한 가닥이 추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는’ 느낌. 여자는 방울을 울리지 않았는데, 방울 속 쇳심이 미세하게 떨려 소리를 만들었다. 소리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방울 안에서 돌다가 꺼졌다.


그때 지운은 깨달았다. 이 광장은 지금 ‘무대’가 아니라 ‘그릇’이 되고 있다. 빛과 소리, 냄새와 온도가 스스로 흘러나가는 게 아니라, 한 방향으로 모여들고 있다. 거울로.


지운은 고개를 들어 광장을 둘러봤다. 가로등이 살아 있는 듯 보였다. 불빛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빛의 줄기가 얇아졌다가 두꺼워졌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전압이 흔들린 것도 아닌데, 빛의 살이 숨을 쉬었다.


멀리 건물 외벽 LED에서 흐르던 광고가 비틀렸다. 무용수가 돌다가 팔을 펼치는 장면에서 멈췄는데, 팔은 매끄럽게 펼쳐지지 못하고 톱니바퀴처럼 끊겨 움직였다. 화면의 색상이 일초에 한 번씩 아주 미세하게 ‘빠졌다’ 들어왔다. 생색(生色)이 빠져나가면 남는 색. 죽은 디스플레이의 잿빛. 그 잿빛이 거울 쪽으로 아주 가느다란 선들을 만들며 흘러갔다.


여자가 말했다.


“지맥을 건드릴 겁니다. 죽은 신의 자리를 만드는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운은 알았다. 설명을 붙일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내려앉을 때마다 발바닥 아래의 아스팔트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지진계로는 잡히지 않을 파문이었지만, 사람의 무릎과 턱과 치아는 알아챌 수밖에 없는 파문. 그는 혀끝으로 이빨을 만졌다.아주 약한, 그러나 분명한 떨림. 치아가 내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머리뼈로 듣는 소리 같았다.


노인은 거울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 동작은 제의(祭儀)였다. 과장이 없었다. 물건이 물건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작. 그가 거울을 천천히 ‘문’의 경계에 가까이 대자, 일렁이던 공기의 얇은 막이 더 끈적해졌다. 공기가 아니라 젤라틴 같았다. 거울면이 그 젤라틴을 밀자, 얇은 막이 거울을 피하지 않고 감싸 안았다. 경계의 두께가 변화했다.


지운은 눈을 떼지 못했다. 목젖이 타는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거울이 더 이상 빛을 반사하지 않고, 빛을 태우기 시작했다. 허공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지운의 귀 안에서 났다. 차가운 땀이 등에 흘렀다. 방금 전까지 비에 젖어 있던 옷이, 다시 젖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방울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방울을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눌림이 방울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운에게는 더 크게 들렸다. 울리면, 무언가가 깨어날 것이다.울리지 않으면, 무언가가 지나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은 선택이 아니다.


노인의 고개가 아주 조금 기울어졌다. 몸짓 하나가 명령이었다. 그 앞의 남자 둘이 동시에 상자를 닫아 들고 뒤로 물러났다. 나머지들은 원의 외곽으로 반 보씩 이동했다.


지운은 여자를 흘끗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거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반사는 ‘역상’이 아니었다. 보통의 반사면에서는 왼쪽이 오른쪽으로 바뀌지만, 그녀의 눈 안의 거울은 정방으로 있었다. 거울 속 거울. 시선이 시선을 만나지 않기 위한, 아주 오래된 기술처럼 보였다. 그녀가 다시,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녀의 손에서 붉은 실이 미세하게 떨렸다. 실 끝의 방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의 쇳심이, 노인의 주문을 정확히 따라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노인의 차가운 눈이 그들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그곳으로 향했다. 그 차가운 눈빛보다 더 서늘한 음성이 날아왔다.


“흠..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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