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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5화

터(址)

by 돌부처

"광화문."


여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지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찻집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한여름 밤인데도.이성과 상식이 녹아내린 자리에, 차가운 공포가 채워졌다. 지운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광화문이라니… 거기서 뭘 어쩐단 말입니까?"


지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잡았다. 나무의 차가운 감촉이 그나마 현실감을 유지시켜 주었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변하는 듯했다. 젊은 여자, 늙은 노파, 아이... 수많은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길을 지키는 사람."


여자는 지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동공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별들과 칠흑 같은 어둠이 뒤섞여 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길을 잃은 사람."


그녀는 다기(茶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너무나 정확하고 우아해서, 마치 천 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한 것 같았다. 찻잔을 닦는 천에서 이상한 문양들이 스쳐 지나갔다. 산스크리트어? 아니, 더 오래된 무언가였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지운은 물러설 수 없었다.


"오늘 밤, 자시(子時)가 되면 그곳의 '터'가 열릴 겁니다."

"터…?"

"열쇠가 문을 찾았으니, 문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여자의 말은 온통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그 말들이 지운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마치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을 일깨우는 것처럼. 지운은 부서질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관자놀이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이 번쩍였다.


그녀는 작은 향나무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여는 순간, 진한 향나무 냄새와 함께 무언가 더 오래된 냄새가 퍼졌다. 무덤의 냄새. 죽음의 냄새. 그리고... 시간의 냄새. 상자 안에는 붉은 비단에 싸인 물건이 있었다. 비단을 벗기자, 손바닥만 한 나침반이 나타났다. 보통의 나침반이 아니었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테두리에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니,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문자들이 서로 위치를 바꾸며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늘 대신, 흑요석으로 깎은 듯한 검고 작은 거북이가 앉아 있었다. 거북이의 등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었고, 눈은 붉은 루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루비가 마치 살아있는 눈처럼 빛났다.


"가져가세요."


여자가 패철을 들어 올리자, 거북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로 살아있는 것일까?


"이게 뭡니까?"

"패철(佩鐵)입니다. 지기(地氣)의 흐름을 읽는 물건이죠. 그것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곳을 찾으세요."


여자는 패철을 지운의 손에 쥐여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니, 마치 다른 차원의 물질을 만지는 것 같은, 차가움을 넘어선 뭔가 다른 감각이었다. .


여자가 지운을 차갑게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살고 싶다면...오늘 밤 자시가 되기 전까지 광화문으로 가세요."


지운은 멈칫했다.


“광화문이라니… 왜 하필—”

“묻지 마십시오.”


그녀는 단호했다.


“그곳에서 문이 열립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길이 달라질 겁니다.”


지운은 필방에서 떠밀리듯 쫓겨났다. 발밑의 다다미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삐걱거리는 문이 닫히자, 그는 다시 비 내리는 인사동 골목에 홀로 남겨졌다. 골목이 변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가게들의 불빛도 모두 꺼져 있었다. 오직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마저도 평소와 달랐다. 노란빛이 아닌, 병든 달처럼 창백한 빛이었다.


비가 이상했다. 빗방울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산성비?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한 감각이었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손바닥 위의 패철. 그리고 '광화문'이라는 단서. 거북이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북쪽을 가리켜야 할 거북이의 머리가 서쪽을 향했다가, 동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그의 이성은 경찰에 신고하라고 소리쳤다. 거울이 사라졌다고. 박물관 CCTV 영상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누가 믿어줄 것인가. 스스로 미친놈이 되는 길일 뿐.


지운은 달리고 또 달렸다. 이 모든 것에서 단지 도망치고 싶었다. 골목 어딘가에 쓰러지듯 주저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운은 다시 젖은 골목을 헤치고 택시에 몸을 밀어 넣으며 짧게 내뱉었다.


"광화문 광장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


젖은 채 차에 오르는 그를, 택시 기사가 힐끔 쳐다봤다. 기사의 얼굴이 백미러에 비쳤다.


"손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신데..."

"아... 네.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날씨 한번 이상하네. 비가 왔다 그쳤다…."


기사가 중얼거렸다.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차창 밖, 서울의 야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빌딩들 사이로 광화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기와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해 붉게 빛났다.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밤 10시 40분.


젖은 아스팔트가 도시의 불빛을 반사해 어지러웠지만 광장은 한산했다. 너무 한산했다. 금요일 밤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실려 이상한 냄새가 났다. 향 냄새? 아니, 더 정확히는... 제사 때 태우는 향 냄새였다. 그는 멍하니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섰다.


거대한 동상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뭔가... 뭔가 달랐다. 동상의 그림자가 이상했다. 달도 없는 밤인데 그림자가 너무 진했고, 그 형태도 왜곡되어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자가 말한 '불안정한 곳'은 어디인가. 그때, 손에 쥔 패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휴대폰 진동 같은 미세한 떨림이었다. 하지만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안에서 탈출하려는 것처럼 떨림은 점점 강해졌다. 지운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거북이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빙글빙글, 점점 더 빠르게. 거북이의 루비 눈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기(地氣)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은 평화로운 서울의 밤.


"내가… 미친 건가? 하.."


헛웃음이 나왔다. 모든 게 거대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패철의 떨림은 분명 실재했다. 그의 시선이 길 건너편, 거대한 전광판에 닿았다. 화려한 광고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최신 스마트폰 광고였다. 그 순간이었다.


치지직-


전광판의 화면이 일그러졌다. 마치 오래된 TV처럼, 화면 가득 노이즈가 끼었다. 처음에는 작은 잡음이었지만, 점점 화면 전체를 뒤덮었다. 광장의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전광판을 가리켰다.


"뭐야, 고장 났나?"

"요즘도 저런 일이 있네."


노이즈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광고 영상이 나왔다. 사람들은 기계 고장이려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운은 보았다. 노이즈가 화면을 뒤덮기 직전,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화면에 스쳐 지나간 기이한 문양. 고대 암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제물 의식을 상징하는 붉은 표식. 그것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광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기압이 급격히 떨어진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발이 무언가에 걸려 비틀거렸다. 균형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의 등이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기단이었다.


차가운 화강암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돌의 온도가 아니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 처럼, 무언가가 그 안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숙여, 비에 젖은 검은 석재를 내려다보았다. 물웅덩이가 고인 기단 위로, 길 건너편 빌딩의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물 표면에서 일렁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반사된 상이, 실제 풍경과 달랐다. 처음에는 빛의 굴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에 비친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빌딩의 불빛 너머로, 무언가 검고 거대한 형체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운은 숨을 멈추고, 물웅덩이를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선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물에 비친 것은,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뒤틀린 나무들과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한, 낯선 공간이 비치고 있었다. 나무들은 검은 철사처럼 구부러져 있었고, 가지 끝에는 잎 대신 눈알들이 매달려 있었다. 바위들은 숨을 쉬는 것처럼 부풀었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떠다니는 것들... 형체를 알 수 없는, 반투명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한가운데. 음산한 녹청색 빛을 발하는, 청동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울이 거기 있었다. 박물관에서 사라진 바로 그 거울이.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마치 액체처럼 거울 표면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하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무언가가.




물웅덩이 속 세상. 착각이다.

빛의 굴절과 대기의 난반사가 만들어낸 우연의 일치.


지운의 이성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는 고고미술사학자이자 보존과학 전문가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물리법칙 안에서 설명되어야만 했다. 엔트로피, 열역학 법칙, 양자역학... 그가 평생 믿어온 과학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 모든 법칙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마치 그의 의식이 각성할수록, 저쪽 세계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처럼. 물웅덩이는 이제 단순한 물웅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窓)이었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혹은 갈라놓는 얇디얇은 막. 그리고 그 막이 찢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 표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잔물결이 일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물결은 저절로, 마치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숨 쉬는 것처럼 일렁였다. 물웅덩이 너머, 그 기괴한 공간이 더욱 선명해졌다. 뒤틀린 나무들이 보였다. 지운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것들은 눈알이었다. 인간의 것도, 동물의 것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의 눈알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눈알들이 일제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시선이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바위들도 평범하지 않았다. 검은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들이 빛났다. 병든 인광처럼 녹색과 보라색이 섞인 빛. 그 빛이 맥박처럼 깜빡였다. 그리고 그 공간을 떠다니는 것들...


청동 거울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울은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검은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니,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그 자체였다. 청동 거울 주변의 어둠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것'과는 달랐다.

더 크고, 더 형태 없는,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순수한 공허. 빛이 그것에 닿는 순간 소멸했다. 소리도, 공기도, 모든 것이 그 어둠에 닿으면 무(無)가 되었다.


어둠이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그것이 닿은 나무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아니, 시든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마치 그림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 청동 거울의 표면에 무언가가 비쳤다. 거대한 눈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파충류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된, 태초의 존재가 가진 눈이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수십 개가 겹쳐져 있었고, 홍채는 은하수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그 눈이 지운을 보았다. 지운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뇌가 불타는 것 같았다. 코피가 흘렀다. 따뜻한 피가 입술을 적셨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 미친 현상이 그저 얇은 수막 위에 맺힌 환상일 뿐이라고, 손가락으로 휘저어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손가락 끝이 수면에 닿는 순간.


파지지직-


차가워야 할 빗물이, 인두에 덴 듯 뜨거웠다.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수천 볼트의 전류가 신경을 태우며 흘러드는 듯한 격통. 동시에 영하의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상반된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순적인 고통.


"악!"


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뺐다. 손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빨간 것을 넘어서 검게 그을려 있었다. 피부가 탄 냄새가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피부는 멀쩡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만 화상을 입은 것처럼.


동시에, 세상이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인식이 변했다. 세상의 소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자동차 소음이, 마치 두꺼운 유리벽 너머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로 다른 것들이 들렸다. 속삭임들이었다. 수천, 수만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정신이 갉아 먹히는 것 같았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들이 들렸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 건물들이 숨 쉬는 소리.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 공기의 냄새도 달라졌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냄새 대신, 수백 년 묵은 무덤을 파헤친 듯한 축축한 흙과 이끼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속에 섞인 달콤한 부패臭. 썩은 과일과 시체가 뒤섞인 역겨우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냄새. 공기의 밀도까지 변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납덩이가 차는 것 같았다. 공기가 아니라 점액질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그 점액질이 폐포를 타고 혈관으로 스며들었다. 온몸에 이물질이 퍼지는 감각.


지운은 깨달았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바로 이 자리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자시(子時)...."


지운은 떨리는 손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정각. 광화문 광장을 둘러싼 모든 가로등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꺼졌다.


퍽.


퍽. 퍽.


두 번째, 세 번째. 연쇄반응처럼 가로등들이 꺼져갔다. 어둠이 가로등을 삼키고 있었다.


퍽. 퍽. 퍽.


하나씩, 차례대로.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빛의 행렬. 마치 누군가 거대한 스위치를 내리는 것처럼. 아니, 더 정확히는... 거대한 존재가 도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광장은 원시의 어둠에 잠겼다. 암흑. 완전한 암흑이었다. 별빛도, 달빛도 닿지 않았다. 하늘이 검은 천으로 덮인 것 같았다. 아니, 하늘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오직 빌딩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광장을 희미하게 비췄다.


지나가는 차들도 일제히 멈췄다. 엔진이 꺼졌다.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다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당황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뭐야, 정전이야?"

"이상하네, 휴대폰도 안 켜져."

"GPS도 먹통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일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천이 솔기를 따라 뜯어지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저쪽 세계가 스며들고 있었다. 물웅덩이 속 풍경이, 현실로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뒤틀린 나무들이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났다. 검은 줄기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하늘로 뻗어 올랐다. 가지에 매달린 눈알들이 일제히 이쪽을 보았다. 기괴한 바위들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 표면의 문양들이 더욱 밝게 빛났다.


공기 자체가 밀도를 가진 젤리처럼 변해가는 끔찍한 감각.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막혔다. 공기가 너무 진해서 폐가 제대로 팽창하지 못했다. 손에 쥔 패철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워졌다. 지운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손바닥이 타는 것 같았다. 패철을 놓으려 했지만 놓을 수 없었다. 마치 손에 용접된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검은 거북이는 이제 맴도는 것을 넘어, 마치 극도의 공포에 질린 것처럼 경련하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도망쳐."


본능이 외쳤다. 모든 세포가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수백만 년 진화의 과정에서 각인된 원초적 공포가 발동했다. 하지만 그의 발은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땅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타르처럼 녹아내렸다. 그의 신발이 그 안에 빠져들었다. 끈적한 검은 물질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그것은 단순한 타르가 아니었다. 살아있었다. 맥박이 느껴졌다. 공포가 그의 모든 근육을 마비시켰다.


그는 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공간의 경계 너머,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처음에는 붉은 점들이었다. 하나, 둘, 셋...수십 개의 붉은 점이, 이쪽을 향해 떠올랐다. 그것은 눈동자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굶주린 짐승의 눈. 아니, 짐승이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랐다. 그것들은 더 원초적이고, 더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그 눈동자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들켰다.'


심장이 멎었다. 그것들이 그를 인식했다. 청동 거울을 만진 자. 봉인을 푼 자. 문을 연 자. 그것들이 경계를 넘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였다. 길고 뒤틀린 그림자들이 찢어진 공간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림자가 닿은 곳의 풀이 시들었다. 콘크리트가 부서졌다. 공기가 썩었다. 그리고 실체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그것들은, 형체조차 불분명했다. 네 발로 기는 짐승 같기도 했다. 개와 늑대를 섞은 듯한 몸. 하지만 너무 크고, 너무 길었다. 털은 없었다. 대신 미끈한 검은 피부가 젖은 가죽처럼 번들거렸다. 피부 아래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근육이 아니었다. 더 작은 무언가들이 피부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운을 향해 다가왔다. 소리 없이. 발자국 소리도 없었다. 숨소리도 없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 공기조차 비켜갔다.


짐승이 입을 벌렸다.


"크르르르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웃음소리였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섞인 웃음소리. 남자, 여자, 노인, 아이...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들의 웃음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것이 한 발 더 다가왔다. 지운은 꼼짝할 수 없었다. 공포가 그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몸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제 끝이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멍하니 서서 뭘 하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 서늘하고, 감정이 없는. 동시에 따뜻했다. 인간의 목소리였다. 이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들리는 유일한 정상적인 소리였다. 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개량 한복. 창백한 얼굴. 붉은 입술. 일심당 필방의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비에 한 방울도 젖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신이 왜…?"


지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너무 말라서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길 잃은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여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광경이 일상적인 것처럼. 그녀가 지운의 팔을 잡자, 타르처럼 녹은 아스팔트가 그를 놓아주었다. 마법처럼. 끈적한 검은 물질이 물러갔다. 여자는 지운을 끌고 동상 뒤편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묘한 소리가 났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실이 묶인 작은 방울이 들려있었다. 은방울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은이 아니었다. 표면에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하얀 빛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순수한 빛이었다. 방울이 울릴 때마다 파수견들이 움찔했다. 그들이 물러섰다. 아니, 정확히는 피했다. 방울 소리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지운을 끌고 동상 뒤편의 거대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동상의 그림자가 이상했다. 너무 진했고, 너무 컸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서자 따뜻했다. 바깥의 지옥 같은 광경과 달리, 그림자 안은 평온했다. 숨쉬기도 편했다. 공기가 정상이었다.


"이곳은..."

"경계의 틈새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 잠시 동안은 안전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숨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추운 것이 아니었다. 두 세계의 온도차 때문이었다.


"보세요."


여자가 턱짓으로 동상 앞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그것들은, 지운이 사라진 곳에서 멈춰 섰다. 그들은 허공을 킁킁거리며, 먹잇감의 냄새를 찾는 듯했다. 코가 없는 것들도 무언가를 맡는 시늉을 했다. 가슴의 구멍이 크게 벌어졌다가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그것들의 숨소리에는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아니, 숨이 아니었다. 그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그것은... 영혼을 빨아들이는 소리였다.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소리.


"저것들은… 뭡니까?"


지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를 넘어선 경외감이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


"문을 지키는 파수견들."


여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속에는 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한때는 길을 지키는 것들이었죠.."

"길이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파수견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정확히 두 사람이 숨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한 발 다가왔다. 그림자의 경계까지 왔다. 그러나 더 이상 지운과 여자를 찾아내지는 못하는 듯 했다.


"이제, 올 겁니다."


여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긴장이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지운은 느꼈다.


“이제 곧… 진짜 손님들이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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