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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4화

빈자리

by 돌부처

“박물관에.. 없다니요?”


지운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깊어 보였다.


다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향로에서 피워오르는 백단향 연기가 천장에 닿아 기묘한 형상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경고하듯 뒤틀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오래된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9시 47분. 자정이 가까워 질 수록 지운은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숨이 막혀왔다.

“무슨 뜻입니까. 그곳은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보안 시설이란 말입니다. 쥐새끼 한 마리 얼씬 못 하는 곳입니다.”


지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15년간 문화재 보존 전문가로 일하며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책임지고 있던 유물이, 그것도 '그' 청동 거울이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자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녀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우아했지만, 어딘가 인간적이지 않은 정확함이 있었다. 마치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반복한 의식처럼.찻잎이 피어오르며 쌉쌀한 향이 퍼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녹차 향이어야 할 텐데, 지운의 코끝에는 썩은 연꽃 같은 달콤하면서도 역겨운 냄새가 스며들었다. 김이 그녀의 얼굴을 희미하게 가렸다. 수증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붉은빛을 띠는 것 같았다. 착각일까.


“애초에 자물쇠는… 그것을 가두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촛불이 흔들렸다. 마치 그녀의 말에 무언가가 반응하는 것처럼.


“자물쇠…?”


지운은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분은 자물쇠였습니다. 수백 년간 땅의 기운으로 단지 그것을 억누르던... 당신들이 그것을 열었고.”


여자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오래된 경전을 읊는 듯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무언가에 씌인 사람이 기계적으로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거울은 열쇠입니다. 스스로 문을 찾아가는.”


그녀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찻집의 온도가 떨어졌다. 지운은 자신의 입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한여름인데도 말이다. 창밖을 보니 달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월식도 아닌데.


지운은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성과 상식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속삭이고 있었다.


'네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그 거울을 처음 만졌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눈 밑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동공이 평소보다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박물관 보안팀장, 김진규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겹도록 길게 느껴졌다. 신호음 사이로 이상한 잡음이 섞여 들렸다.


“여보세요.”


피곤에 절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박사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저 퇴근했는데….”

“김 팀장님. 지금 바로 제1 보존과학실 확인 좀 부탁합니다.”


지운이 말하는 순간, 찻집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여자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네? 거긴 박사님 외엔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됐고, 확인부터 하세요. 안에 있는… 유물. 청동 거울. 제대로 있는지.”


지운이 '청동 거울'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민의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팀장의 귀찮음 섞인 한숨이 들렸다.


“하아… 알겠습니다. 근처에 있긴 하니, 가서 보죠.”


전화가 끊겼다.

정적이 흘렀다.


지운은 숨을 죽였다. 앞에 앉은 여자는 그저 조용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찻잔을 드는 그녀의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너무 하얗고 너무 가늘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지운의 심장도 함께 뛰었다.


째깍. 쿵. 째깍. 쿵.


"그것을 만졌나요?"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지운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갑을 끼고 만졌습니다."


지운의 오른손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실험실에서 그는 실수를 했다. 아니, 실수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장갑을 벗은 손으로 거울 표면을 쓸어 내렸던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감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마치 살아 있는 피부를 만지는 듯한 기묘한 촉감.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김 팀장이었다. 지운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바꾸지도 않았는데, 여자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팀장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 박사님.”


몇 분 전과는 180도 다른 목소리.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말입니까?”

“없습니다. 박사님. 사라졌습니다.”


지운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사라지다니요! 누가 침입이라도 했습니까? 경보는! 센서는!”

“아닙니다. 그게 이상한 겁니다.”


팀장의 목소리가 공포로 젖어들었다.


“모든 게 정상입니다. 출입 기록도 없고, 외부 침입 흔적도 없습니다. 적외선 센서도, 무게 센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보존실 문도 박사님께서 나가실 때 그대로 잠겨 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대체 어떻게!”

“CCTV… CCTV를 확인했습니다, 박사님.”


팀장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박사님 나가시고 나서… 계속 빈 복도만 찍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요!”


지운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팀장은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17분 전. 화면이… 딱 한 번 지지직거리더니… 거울이 있던 자리가… 그냥…그냥, 비어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박사님... 화면이 지지직거릴 때... 잠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형체는 알 수 없었는데... 눈이... 수십 개의 붉은 눈이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지운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쿵.


다다미 바닥 위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멍하니 앞을 보았다. 여자는 마지막 남은 찻물을 비우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누가… 가져간 게 아닙니다.”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스로… 움직인 겁니다. 자신을 부른 자에게로.”

“부른 자…?”

“열쇠를 쥐고 문을 열, 새로운 주인.”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지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지운은 기묘한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연민과도 같았다.


“당신은 너무 깊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당신도 그들의 표적이 될 겁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제가 뭘 했다는거죠?”

“죽은 신을 깨워, 세상을 제물로 바치려는 자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알 수 없게 만드는 자들이죠.”


여자는 다실 벽에 걸린 낡은 족자 하나를 가리켰다. 산수화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기이한 형태의 지도였다. 산과 강줄기가 마치 혈관처럼 꿈틀대는 듯했다. 붉은 먹으로 표시된 점들이 마치 몸속의 혈 자리 같았다.지운이 족자를 보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지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붉은 점들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열쇠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문을 열기 위해.”


그녀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점을 찍었다. 수많은 혈맥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 서울의 중심.


“광화문. 이제 시작입니다. 당신이 깨운 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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