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너머
시간이 멈췄다.
아니, 한지운의 심장이 멎었다. 혈액이 얼어붙고, 폐가 수축했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틈 너머의 그것. 10센티미터 남짓 열린 보존과학실 문. 그 틈새로 보이는 어둠 속에, 그것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림자인 줄 알았다. 분석 장비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그림자.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하게 뒤틀린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 마치 뼈가 부러진 채로 다시 붙은 것처럼 인간의 관절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접혀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형태로 태어난 것처럼. 바닥에 끌릴 듯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각각의 머리카락이 독립된 생명체처럼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이 분석대 위, 청동 거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니, '앉아있다'는 표현은 틀렸다. 그것은 마치 거미처럼 팔다리를 접고 거울 위에 '매달려' 있었다. 중력을 무시한 채.
'환각이다.'
지운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파레이돌리아. 과로와 김 교수의 죽음이 만들어낸 트라우마 반응.'
하지만 그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그의 뇌간, 파충류의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망쳐. 지금 당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가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마비시켰다. 토끼가 뱀을 마주했을 때처럼, 그는 얼어붙었다.
순간, 그것의 고개가 돌아갔다.
우두둑. 딱. 딱.
뼈가 어긋나는 소리. 목뼈가 360도 회전하는 소리. 인간의 육체로는 낼 수 없는, 죽음의 소리.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점이 나타났다. 눈동자인지, 구멍인지, 혹은 심연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시선이 물리적인 무게를 가진 것처럼,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그리고 그것이 미소 지었다.입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찾았다.'
지운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치아가 딱딱 부딪혔다. 8월의 여름밤인데도 그의 숨은 하얗게 나왔다. DMZ에서 김 교수가 느꼈을 그 한기. 죽음의 차가움이 복도를 타고 흘러왔다.
-띵-
멀리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B3층 순찰 시작합니다."
무전기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순찰을 도는 보안팀이었다. 그 소리에, 그것이 반응했다.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목뼈가 나선형으로 꼬이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
스르륵-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대로, 웅크린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검은 물처럼. 중력을 따라 흐르듯이.
분석대에서 바닥으로. 바닥에서 그림자 속으로. 그림자에서 어둠 속으로. 형체가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지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을 뿐이라는 것을.
"한 박사님?"
손전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보안팀 직원 둘이 다가오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중년 여자였다.
"순찰 중인데 복도에 계시네요? 지금 새벽 2시인데..."
지운은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어? 박사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완전히..."
중년 여직원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안에... 안에..."
지운이 간신히 말했다. 떨리는 손으로 보존과학실을 가리켰다. 두 직원이 서로를 바라봤다. 젊은 남자 직원이 문을 열었다.
"뭐가 있다는..."
찰칵.
형광등이 켜졌다. 하얀 빛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텅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원래 있어야 할 것들만 있었다. 분석 장비들, 보관함들, 그리고 분석대 위의 청동 거울.
"박사님, 아무것도 없는데요?"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지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실내로 들어섰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바닥을 살폈다. 깨진 비커 조각들이 여전히 흩어져 있었다.
"박사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며칠째 밤을 새우신 것 같던데..."
여직원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김 교수님 일도 있고... 충격이 크셨을 텐데. 집에 가서 쉬시는 게..."
"잠깐."
지운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분석대 아래. 그것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아니, 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끈적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한 올.
보통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너무 길었고, 너무 굵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운은 재빨리 핀셋을 꺼내 머리카락을 집어 샘플 봉투에 넣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증거를 수집하는 겁니다."
"증거요? 무슨..."
지운은 대답하지 않고 청동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뿌연 표면, 언제나처럼 흐릿한...
아니다. 한가운데, 작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이 손만 한 크기. 그리고 그 주변으로 물기가 서려 있었다. 거울 표면에서 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거울이 숨을 쉬는 것처럼.
"이게 보이십니까?"
지운이 물었다. 두 직원이 다가와 거울을 들여다봤다.
"뭐가요? 그냥 오래된 거울인데..."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손자국도, 습기도. 지운은 깨달았다. 자신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자신만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CCTV 기록을 봐야 합니다."
지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새벽인데... 그건 절차가..."
"지금 당장이요."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에 가까운 절박함이 있었다.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보안실로 안내했다. 지하 1층 보안실. 수십 개의 모니터가 박물관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다. 24시간 근무하는 보안 요원이 졸린 눈을 비비며 그들을 맞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30분 전 B3층 복도 영상을 봐야 합니다."
"이 시간에요? 뭔가 문제가..."
"한지운 박사입니다. 제 권한으로 요청합니다."
보안 요원이 마지못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이 바뀌었다.
02:23:15
복도가 비어있다. 센서등이 꺼져 있다.
02:23:47
보존과학실 문이 열린다. 한지운이 나온다. 그가 문 앞에 서서 무언가를 바라본다.
02:24:03
그가 바닥을 본다. 몸을 숙여 무언가를 집어 든다. 하얀 봉투.
02:24:28
그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다. 놀란 표정. 복도 끝을 바라본다.
02:24:35
그가 복도 끝으로 달려간다.
02:24:52
화면이 바뀐다. 다른 복도. 한지운이 나타난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02:25:14
그가 다시 보존과학실로 돌아온다. 문 앞에서 멈춘다. 무언가를 보는 듯 경직된다.
02:25:31
그가 뒷걸음질 친다. 공포에 질린 표정. 하지만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셨죠? 박사님 혼자 계셨어요."
보안 요원이 말했다. 지운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 있었다. 하지만 CCTV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각도는?"
"다른 각도요?"
"보존과학실 내부 CCTV."
"거기는 연구 기밀 때문에 CCTV가 없잖아요. 박사님이 더 잘 아시면서."
맞다. 유물 분석 과정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가 직접 요청한 사항이었다. 지운은 좌절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화면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잠깐, 여기 확대해 주세요."
"어디요?"
"복도 바닥. 제가 봉투를 주운 그 지점."
화면이 확대되었다. 봉투가 놓여있다. 하지만 그 옆에 작은 얼룩이 있었다. 젖은 발자국 같은 것. 그것은 복도 끝에서 시작해 보존과학실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게 뭐죠?"
"습기 같은데... 배관 누수인가?"
"아니에요. 발자국입니다."
지운이 확신했다. 젖은 발자국. 작고, 기형적인 발자국. 그리고 그것은 CCTV가 잡지 못한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이었다.
"10분 더 전으로 돌려주세요."
02:13:00
복도는 여전히 비어있다.
"여기, 이 순간."
02:13:27
화면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노이즈가 생긴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전자기 간섭?"
"이 정도 간섭은... 강력한 자기장이 있어야 하는데."
지운은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그는 보안실을 나와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새벽 3시.
지운은 지하 2층 구석에 있는 개인 연구실로 돌아왔다. 연구실 문에는 '특수 유물 분석실'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 책상 위에 증거품들을 늘어놓았다. 머리카락 한 올. 물기 묻은 거즈. 그리고 경고문이 적힌 한지. 먼저 머리카락부터 분석했다. 현미경 아래 올려놓고 400배율로 확대했다.
"이건..."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일반적인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케라틴 단백질이 층층이 쌓인 구조.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살아있었다.머리카락 내부에 미세한 혈관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안으로 검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표면에는 미세한 섬모들이 있었다. 꿈틀거리는 섬모들. 지운은 샘플을 조금 잘라 DNA 분석기에 넣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한지를 분석했다. 종이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제작 시기, 제작 장소, 심지어 만든 사람의 습관까지. 현미경으로 섬유질을 관찰했다. 닥나무 섬유. 전통 한지의 주재료. 하지만 일반 한지와는 달랐다. 섬유 사이사이에 다른 식물이 섞여 있었다.
"쑥... 그리고 이건... 창포?"
벽사(辟邪)의 식물들이었다.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지는 식물들. 더 자세히 보니, 섬유 배열에 특정한 패턴이 있었다. 일종의 워터마크처럼, 종이 자체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팔괘(八卦) 문양이었다. 이런 한지를 만드는 곳은... 지운은 노트북을 열고 검색을 시작했다.
'전통 한지 공방' '쑥 창포 한지' '팔괘 문양'
검색 결과는 단 하나였다. 인사동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오래된 필방.
지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이성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깃들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었다.
인사동.
그곳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