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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록 (禁祭錄)] - 1화

만지지 말았어야 했다

by 돌부처



찌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단순한 여름 곤충의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며 새어나오는 비명처럼, 공기를 진동시키고 고막을 찢었다.


DMZ 남방한계선 인근.


이곳은 거대한 가마솥이었다. 70년간 인간의 발길이 끊긴 땅. 그 시간 동안 자연은 인간의 상처를 덮었지만, 동시에 그 아래 묻힌 원한과 증오를 발효시켰다.

끓어오르는 대지는 숨 막히는 지열을 뿜어냈고, 녹슨 철책에서 흘러나온 쇠 냄새와 썩은 풀잎의 비린내가 뒤섞여 독기처럼 퍼졌다.


"젠장할..."


한지운은 셔츠에 스며든 땀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의 세계는 이런 곳이 아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완벽하게 통제된 수장고.

섭씨 20도, 습도 55%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항온항습실. 백색 LED 조명 아래 진열된 유물들. 그것이 그가 속한 세계였다. 먼지 한 톨까지 계산되고 통제되는, 완벽한 질서의 공간.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DMZ는 살아있었다.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썩어가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과 자연의 광기가 뒤엉킨 이 경계선에서, 지운은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한 박사! 한 박사!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발굴 현장 책임자인 김정호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60대 후반의 이 고고학자는 흥분하면 목소리가 갈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신의 작품이야! 신의 작품! 내 평생 이런 건 처음이라네!"


지운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지뢰처럼 널린 돌부리들, 철조망 파편들, 그리고 오래 전 전쟁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피해가며.


'명예와 발견에 굶주린 늙은 하이에나.'


지운은 속으로 김 교수를 그렇게 평가했다. 학계의 인정, 언론의 조명,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전시실. 김정호가 원하는 것은 뻔했다.


발굴 피트는 깊이 3미터 정도 파여 있었다. 군 공병대가 투입되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고 있었다. 지운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섰을 때, 그것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푸른 빛. 아니,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심해! 천천히! 더 천천히!"


김 교수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묻어났다. 흙이 한 줌씩 걷혀질 때마다,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동 거울이었다. 직경 약 30센티미터. 하지만 그 형태는 김정호 박사가 30년간 박물관에서 일하며 본 어떤 유물과도 달랐다.


일반적인 청동 거울은 시간이 지나면 녹청이 슬어 푸르스름하게 변한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마치 기름을 부은 듯 음산하게 번들거렸고, 표면은 검은 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뒷면에는 거울 뒷면에는 열두 마리의 짐승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십이지신상...?"


지운의 눈이 좁아졌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시간의 순환을 상징하는 십이지신. 하지만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십이지신은 언제나 시계 방향으로 배열된다. 자(子)에서 시작해 축(丑), 인(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순환.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시간의 질서였다. 하지만 이 거울의 짐승들은...열두 짐승이 시간을 거슬러 달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질서를 조롱하듯, 혹은 무언가를 되돌리려는 저주처럼.


"반시계 방향이군요."


지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형식은... 문헌에도 없습니다. 정식 발굴 기록에도 보고된 적이 없는..."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거지!"


김 교수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한 박사,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야. 이건... 반역이지!

시대를 거스른 고대 장인의 위대한 도전이야!

이거 하나면 김정호 기념관은 따 놓은 당상이고..."


그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거울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맨손으로 만지지 마십시오."


얼음처럼 차가운 지운의 목소리가 현장을 갈랐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록입니다. 시간의 기록, 인간의 기록, 그리고..."


지운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를 감지한 듯 거울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때로는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김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보다 30년은 어린 학예사에게 면박을 당한 것이 자존심 상했지만, 지운의 차가운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흠... 그래, 그래. 조심해야지."


그는 마지못해 장갑을 꼈다. 두꺼운 면장갑 위에 라텍스 장갑을 덧씌우고, 조심스럽게 거울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여름 오후 2시의 태양이 정점에서 내리쬐던 그 빛이 거울 표면에 닿자, 거울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검은 표면이 물결치듯 일렁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사된 빛이 맞은편에서 흙을 파내던 젊은 병사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으악!"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삽이 손에서 빠져나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바위에 부딪혔다.


"뭐 하는 거야!"


장교가 다가와 호통을 쳤다.


"놀란 것도 정도가 있지! 정신 차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병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확장되어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떨렸다.


"거울 속에... 거울 속에 뭔가 있었습니다!"

"뭐? 네 얼굴이 비친 거겠지!"

"아닙니다! 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는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노인이었습니다... 눈알이 없는 노인이... 저를 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입을 벌렸는데... 입 안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손짓을 했습니다. 이리 오라고... 같이 가자고..."


장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운은 떨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무의미한 시각 자극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려는 뇌의 착각. 구름에서 동물 모양을 보거나, 벽지 무늬에서 얼굴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현상. 더위와 피로, 그리고 DMZ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일 것이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소리가 사라졌다.


찌이이이이-


지옥처럼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마치 누군가 볼륨을 0으로 돌린 것처럼 뚝 끊겼다. 바람 소리도, 병사들의 숨소리도, 심지어 자신의 심장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그것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었다. 소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 같은 무음이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왔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푸드득-


아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보았다'. 수십 마리의 새들이 날갯짓을 멈춘 채,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참새, 까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새들이 추락했다. 마치 하늘이 그들을 토해내는 것처럼. 어떤 새는 나뭇가지에 부딪혀 목이 꺾였고, 어떤 새는 바위에 떨어져 붉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소리는 없었다. 부딪히는 소리도, 부러지는 소리도, 피가 떨어지는 소리도. 오직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무성영화 같은 죽음의 향연. 정적은 정확히 3초간 지속되었다.


찌이이이이이이이-


매미들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 방금 뭐였지?"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압 차이? 뭐 그런건가...?"

"새들이 왜..."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떨어진 새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김 교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거울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오직 한지운만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니, 유지하려고 애썼다.


"자기장 이상 현상인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설명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거울이 빛을 반사한 순간. 병사가 비명을 지른 순간. 그리고 세상이 멈춘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의 뇌 깊은 곳에서 원시적인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도망쳐.'


하지만 그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한지운은 언제나 이성의 편에 섰다.


"자, 자! 다들 정신 차려!"


김 교수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귀한 보물이 나왔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어서 안전하게 포장해서 옮기자고!"


그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수 제작된 유물 보관함이 준비되었다. 내부는 충격 흡수 소재로 채워져 있었고, 온습도 유지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거울은 여러 겹의 한지와 솜으로 감싸져 조심스럽게 보관함에 안치되었다. 김 교수는 직접 봉인 테이프를 붙이고,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이제 됐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직행이다!"


군용 트럭에 보관함이 실렸다. 철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발굴팀은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병사들은 구덩이를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한 박사."


김정호 교수가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 있었다.


"덕분에 귀한 구경했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 보물을 놓칠 뻔했어."


그는 흙 묻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서울 가면 내가 한턱 낼게. 을지로 골목에 아는 집이 있는데, 거기 평양냉면이 일품이지. 시원한 냉면에 소주 한잔..."


그때였다.


"크... 허억...!"


김 교수의 말이 기괴한 소음으로 변했다. 그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마치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었고,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교, 교수님?"


지운이 다가가려 했지만, 김 교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8월의 폭염 속에서, 그는 얼어 죽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은 파랗게 변했고, 피부에는 서리가 맺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치아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총소리처럼 울렸다.


"추... 워... 너무... 추워..."


김 교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밀어내려는 듯,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지운의 등 뒤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그 눈빛. 지운은 평생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영혼이 찢겨 나가는 절대적인 절망이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김 교수가 울부짖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교수님! 정신 차리세요!"


지운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의무병이 달려왔다. 체온을 재려 했지만 체온계는 에러를 표시했다.


"이상해요! 체온이... 체온이 측정이 안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체온이.. 너무 낮습니다!"


그때 김 교수가 마지막 힘을 짜내 지운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는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얼어붙은 입술로, 간신히 단어들을 뱉어냈다.


"거울... 거울에..."


김 교수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초점을 잃어갔다.


"교수님!"


툭.


김 교수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지운의 팔을 붙잡고 있었지만,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정적.


발굴 현장은 죽음의 정적에 잠겼다.


"교수님... 교수님!"


의무병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김정호 교수의 몸은 이미 시체처럼 차가웠다.


"사인이... 사인을 알 수 없습니다."


의무병이 당황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외상은 전혀 없고... 하지만 체온이... 동사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날씨에..."


지운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군용 트럭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화물칸. 그 안에 봉인된 역십이지신상 동경.


'거울에...거울에...'


김 교수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운은 트럭으로 걸어갔다. 병사들이 수군거렸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화물칸 문을 열었다.

보관함은 그대로 있었다. 봉인도 온전했다. 하지만, 지운은 느낄 수 있었다. 보관함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마치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병이 본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매미가 멈춘 것도, 새들이 떨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봉인이 풀린 것이다. 천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에 봉인되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짐승들이 새겨진 청동 거울.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사이렌 소리가 DMZ의 정적을 찢었다.


구급차, 군용 지프, 그리고 검은색 세단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빨간색과 파란색 경광등이 어지럽게 회전하며 발굴 현장을 비현실적인 무대로 만들었다.


김정호 교수의 시신은 허무하게 흰 천으로 덮였다. 천 아래로 삐져나온 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움켜쥔 듯 굳어 있었다. 의무병들이 들것에 시신을 옮기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신이 땅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합니다.. 시신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냥 들어!"


세 명의 병사가 힘을 합쳐 겨우 시신을 들어 올렸다. 8월의 한낮, 섭씨 35도의 폭염 속에서 시신이 있던 자리의 흙은 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었다.


"한지운 박사님이시죠?"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운의 생각을 끊었다. 군 수사관이었다. 계급장에는 대위 표시가 있었다.


"박준서 대위입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그는 닳아빠진 전투복만큼이나 지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 같았다. 이어진 것은 끝없는 조사와 질문들이었다. 지운은 기계처럼 사실만을 반복했다.


"김 교수님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어떻게 쓰러졌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몸이 경직되었고, 춥다고 했습니다."


박 대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이 날씨에 춥다고요? 체온을 쟀습니까?"

"의무병이 시도했지만, 체온계가 오작동했다고..."

"오작동?"

"체온이 측정이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박 대위가 펜을 멈췄다. 그의 눈이 지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특이사항은? 목격한 것, 들은 것, 아무리 사소해도 좋습니다."


지운은 잠시 망설였다. 눈앞에 그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3초. 하늘에서 돌처럼 떨어진 새들. 이병이 거울 속에서 봤다는 눈 없는 노인. 그리고 김 교수의 마지막 말.


'거울에... 거울에...'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했습니다'라고? 그의 학자 경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박 대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지운을 바라봤다.


"정말 없었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 대위는 수첩을 덮었다. 하지만 일어서기 전에 덧붙였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발굴된 유물, 청동 거울 말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까?"


지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일반적인 청동 거울입니다. 다만 십이지신상이 역방향으로..."

"역방향?"

"시간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흥미로운 사례죠."


박 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울은 어디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조사가 더 필요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 대위가 일어섰다.



사흘 후.

한국대학교병원 법의학교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에요."


장서린 법의관이 부검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녀는 지운과 대학 시절, 연인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각자의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일 뿐이었다.


"심장에 미세한 파열이 있었어요. 극도의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보입니다."


지운은 보고서를 훑어봤다. 깔끔하게 정리된 의학 용어들. 모든 것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그런데..."


서린이 망설이며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뭐가?"

"시신의 상태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사망 후 3일이 지났는데도 부패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오히려?"

"냉동 보존된 것처럼 신선했어요. 세포 조직이 얼음 결정에 손상된 흔적도 있었고."


지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이건 보고서에 쓰지 못했지만..."


서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뇌를 해부했을 때, 송과체(pineal gland)가 이상하게 비대해져 있었어요. 보통 사람의 3배 크기였죠. 그리고..."

"그리고?"

"검게 변색되어 있었어요. 마치 먹물을 주입한 것처럼."


송과체. '제3의 눈'이라 불리는 기관. 고대부터 영혼의 자리로 여겨졌던 신비한 부위.


"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


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그래서 보고서에서 뺐어요. 내 커리어가 끝날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현장에서 정말 아무일도 없었어요?"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1 보존과학실.

지하 3층,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 이중 보안 시스템과 생체 인식 잠금장치로 보호되는 공간. 역십이지신상 동경'은 특별 허가를 받아 이곳으로 옮겨졌다. 공식 명칭은 '군사지역 출토 미확인 금속 유물 K-2025-DMZ-001'.


지운은 하얀 방진복을 입었다. 마스크와 고글, 이중 장갑까지 완벽하게 착용했다. 모든 것이 프로토콜대로였다.


특수 보관함은 3중 잠금장치로 봉인되어 있었다. 첫 번째 자물쇠를 열자,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다. 두 번째를 열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세 번째 자물쇠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멈췄다.손이 떨리고 있었다.


'겁먹은 거야? 단순한 유물에?'


그는 자신을 질책하며 마지막 자물쇠를 열었다. 뚜껑이 열렸다. 음산한 녹청색 거울이 특수 쿠션 위에 누워 있었다. LED 조명 아래서, 거울 표면은 기름막처럼 일렁였다. 지운은 거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분석대로 옮겼다.


먼저 비파괴 검사부터 시작했다. X선 형광분석기(XRF)를 작동시켰다. 기계가 윙 소리를 내며 거울을 스캔했다. 모니터에 그래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구리 78.3%, 주석 20.1%, 납 1.2%..."


일반적인 청동 조성이었다. 하지만, 0.001% 미만의 미량 원소 분석 결과가 떴다.


"뭐야, 이게?"


이리듐(Ir) - 0.0003%

오스뮴(Os) - 0.0002%

로듐(Rh) - 0.0001%


지운의 눈이 커졌다. 이들은 백금족 원소들이었다. 지구상에서는 극히 드물고, 주로 운석에서 발견되는 물질들이었다.


"운석 금속을 섞었다고?"


고대에 운석은 '하늘의 금속'으로 신성시되었다.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의 단검도 운석철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청동에 운석 금속을 합금하는 기술은...


다음은 감마선 투과 촬영이었다. 거울 내부 구조를 3D로 스캔하는 작업.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거울 내부에는 미세한 공동(cavity)들이 벌집처럼 퍼져 있었다. 그 공동들은 무작위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정교한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프랙탈 구조였다. 자기 유사성을 가진 무한 반복 패턴.


"이건... 불가능해."


2000년 전 기술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구조였다. 현대 기술로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가장 기이한 것은 온도 측정 결과였다. 적외선 온도계가 보여주는 숫자는 18.6도. 실내 온도는 21도였다. 거울은 주변보다 정확히 2.4도 낮았다.


"열역학 제2법칙 위반이잖아..."


모든 물체는 주변 환경과 열평형을 이루려 한다. 외부 에너지 없이 스스로 차가워질 수는 없다. 지운은 다시 측정했다. 같은 결과였다. 실내 온도를 25도로 올렸다. 거울은 22.6도를 유지했다. 18도로 낮췄다. 거울은 15.6도가 되었다. 항상 정확히 2.4도 차이.


"대체 뭐냐, 넌..."


그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뿌연 표면에는 천장의 LED 조명만 흐릿하게 비칠 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거울 표면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숨을 쉬듯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장갑 너머로도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아주 잠깐, 눈 깜짝할 사이에 거울 표면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림자 같은 것. 아니, 얼굴 같은 것. 지운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착각이야. 피곤해서 그래.'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똑. 똑.


보존과학실의 방음문을 두드리는 소리. 지운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분석 중에는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 분석 중입니다."


대답이 없었다.


똑. 똑. 똑.


이번엔 더 급하게 두드렸다. 지운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장갑을 벗고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


문을 열자마자 말이 멎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센서등도 꺼져 있었다. 이상했다.


"누구 있어요?"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서 메아리쳤다. 바닥을 보니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봉투. 지운은 주변을 둘러보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한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붓글씨로 쓰인 한 문장.


『死者之物을 生者가 貪하지 말라』

(죽은 자의 것을 산 자가 탐하지 말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낸 거지? 어떻게 박물관 보안을 뚫고? 복도 끝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그림자 같은 것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거기 서!"


지운이 뛰어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또 텅 빈 복도뿐이었다. CCTV를 확인해야 한다. 보안실에 연락해야 한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보존과학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지운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분명 닫혀 있어야 할 자동문이 10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불이 꺼져 있는 보존과학실 내부가 보였다. 지운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다.


보존과학실은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상등만이 희미한 녹색 빛을 내고 있었다.


"누구 있어요?"


지운은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찰칵.


불이 켜지고, 그는 분석대 위, 거울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거울은 그대로 있었다. 그 옆에는 깨진 비커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지운의 숨이 가빠졌다. 그때, 거울이 움직였다. 아니, 거울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검은 형체가 거울 표면 아래에서 떠올랐다. 처음엔 흐릿했지만, 점점 선명해졌다. 사람이었다. 긴 검은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지운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거울 속에서 손을 뻗었다. 마치 수면을 뚫듯이 손가락이 거울 표면을 뚫고 나왔다. 창백하고 길쭉한 손가락. 손톱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손이 거울 테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먼저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어깨가 나왔다.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펴졌다.


지운은 뒷걸음질 쳤다. 문을 향해 달려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완전히 거울 밖으로 나왔다.부자연스럽게 길쭉한 팔다리. 아이 같기도 한 형상이었다. 그것은 거울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얼굴이 없는 머리를 지운 쪽으로 돌렸다.


입이 없는데도, 그것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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