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로 그린 미로
다음 날, 오후 2시.
인사동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8월의 장맛비가 아니었다. 차갑고 끈적한 비. 빗방울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저림이 느껴졌다. 마치 죽은 자의 손길처럼. 오래된 한옥의 처마 끝에서 빗물이 낙숫물처럼 떨어졌다. 기와 틈새로 스며든 물이 검은 줄기를 만들며 흘러내렸다. 언뜻 보면 혈관처럼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알록달록한 우산. 달콤한 엿 냄새. 전통 찻집의 웃음소리.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한지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이미 균열이 생겼다. 어제 보존과학실에서 본 그것. 거울 속에서 기어 나오던 형체. 이 평화로운 일상 아래, 무엇이 꿈틀대고 있는지 그는 이제 알았다. 그는 우산도 없이 좁은 골목을 헤맸다. 젖은 어깨 위로 8월의 비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 비슷비슷한 가게들. 30분을 넘게 헤맸다.
이상했다. 인사동은 그리 넓지 않은데, 마치 공간이 늘어난 것 같았다. 같은 곳을 계속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누군가 길을 숨기고 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일심당은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가 그곳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빗속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눈은 황금빛이었다. 그것이 지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운의 머릿속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는 것을 찾으려면, 눈을 감아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운은 멈칫하다, 걸음을 멈추고 멈춰서서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눈을 감았는데도 '보였다'. 아니, 골목의 진짜 형태를 느꼈다.
일종의 결계(結界)였다. 누군가 주술로 공간을 왜곡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구멍이 있었다. 숨겨진 통로. 지운은 눈을 감은 채 걸었다. 벽을 향해. 분명 막힌 벽이었는데, 그의 몸이 통과했다. 마치 물속을 지나듯이.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막다른 골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서 있었다.
'일심당(一心堂) 필방'
간판의 글씨는 비바람에 깎여 거의 지워져 있었다. 나무문은 세월의 무게로 휘어져 있었고, 창문은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100년은 된 것 같은 가게. 아니, 시간 밖에 존재하는 것 같은 공간.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자, 묵향(墨香)이 훅 끼쳐왔다. 단순한 먹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종이와 곰팡이, 그리고 차가운 흙냄새가 뒤섞인, 시간의 냄새였다.
가게 내부는 어두웠다. 천장까지 닿은 선반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위에는 두루마리들과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어떤 것은 겉표지가 완전히 삭아 없어졌고, 어떤 것은 검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벽에는 붓들이 걸려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 어떤 붓은 털이 하얗게 센 것 같았고, 어떤 붓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것 같았다.
그리고 냄새. 가게 전체에서 올라오는 묘한 냄새. 단순히 오래된 것의 냄새가 아니었다. 무언가 살아있는 것의 냄새. 하지만 동시에 죽은 것의 냄새이기도 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선반들 중에는 한지와 붓이 쌓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들이 아니었다. 가죽이었다. 동물의 피부처럼 보이는 누런 가죽들. 그 위에 붉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들. 그리고 붓처럼 보이는 것은 뼈였다. 무언가의 손가락 뼈를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계십니까."
지운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똑. 똑. 물방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그가 막 돌아서려던 순간.
"무엇을 찾으시는지."
안쪽 발 너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목소리는 젊었지만, 그 안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마치 오래된 우물 바닥에서 올라오는 메아리 같았다. 발이 걷히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개량 한복. 허리까지 내려오는 쪽 지지 않은 긴 생머리. 화장기 없는 새하얀 얼굴. 그리고 눈.
그녀의 눈은 가게 안의 어둠보다 더 깊었다. 동공과 홍채의 경계가 모호했다. 마치 먹물을 떨어뜨린 물처럼, 검은색이 번져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20대처럼 보이기도, 50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빛에 따라, 각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얼굴.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어둠에서 응결되어 갑자기 실체를 가진 것처럼 그 여자가 나타났다.
"한지를 좀 보러 왔습니다."
지운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방수 봉투를 꺼냈다. 그가 받은 경고문. 여자가 한지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종이에 닿는 순간.
찌지직-
정전기 같은 것이 튀었다. 아니, 정전기가 아니었다. 푸른 불꽃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여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하지만 지운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 속에 스친 감정을.
"이런 종이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한지를 돌려주었다. 거짓말이었다. 지운은 확신했다.
"강화 약쑥을 섞은 한지입니다."
지운이 말했다.
"섬유 사이에 쑥과 창포가 섞여 있고, 팔괘 문양이 워터마크로 새겨져 있죠. 이걸 만드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 그리고 그 종이를 독점적으로 받는 곳은 바로 여기, 일심당 필방뿐이죠. 제 분석이 틀렸습니까?"
여자는 대답 대신 지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뼈를 투과해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시선.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착각이라..."
지운은 피식 웃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내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그날 보존과학실 바닥에서 주운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 들어있었다.
"이것도 착각입니까?"
여자의 시선이 지퍼백에 닿은 그 순간.
웅-
가게 전체가 진동했다. 아니, 진동이 아니었다. 맥박이었다.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리듬. 벽에 걸린 붓들이 일제히 흔들렸고, 선반의 책들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천장의 백열등이 치직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여자의 얼굴이 변했다. 젊은 얼굴에서 노파의 얼굴로. 인간의 얼굴에서...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그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놀람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분노에 가까웠다. 신성한 영역을 침범당한 자의 분노.
"어디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1 보존과학실 바닥입니다."
지운은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이 모든 게 뭔지 설명해주시죠."
정적이 흘렀다. 가게 밖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발소리처럼.
여자는 한참 동안 지운을 바라보았다. 그를 시험하듯, 그의 영혼 속까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것을... 보셨군요."
"그것?"
여자는 안쪽으로 고갯짓했다.
"들어오시죠.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그녀는 발 너머의 어두운 공간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운은 잠시 망설였다. 저 어둠 너머에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는 결심한 듯,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가게보다 더 짙은 묵향. 그리고 그 속에 섞인 희미한 향 냄새. 백단향인지, 침향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향. 안쪽은 작은 다실(茶室)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다실은 아니었다. 벽에는 기이한 족자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부적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수백, 수천 장의 부적. 어떤 것은 새것이었고, 어떤 것은 100년은 넘어 보였다.
"앉으세요."
여자가 말했다. 지운이 자리에 앉자, 그녀가 차를 내왔다. 검은색 찻물. 쓴 냄새가 올라왔다.
"흑차입니다. 마음을 안정시키죠. 필요하실 겁니다."
지운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쓰면서도 달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졌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제야 여자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박물관 보존실에..."
지운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제가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머리카락의 주인, 그 이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오. 그것이 나온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거울 말인가요?"
"그것을 거울이라 부르시는 군요"
여자가 웃었다.
"그것은 거울이 아닙니다. 열쇠입니다.
그 열쇠... 그 거울은 지금 박물관에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