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에 음악 감상실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자주 찾던 음악 감상실 벽 한 켠에는 빼곡하게 LP레코드가 채워져 있었다. 커피 한잔과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한권 들고가 읽다가 심심해지면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아주 가끔은 10대 후반의 앳되어 보이는 무리들도 오곤 했으나, 딱히 그 들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딸랑.
그 날도 나른하기 짝이 없는 따스한 봄날 오후였다. 문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앳된 여고생 둘이 키득거리며 안으로 들어선다. 그 중 하나는 몇 차례 마주쳐 낯이 익었고, 두리번 거리며 뛰따라 들어서는 하얀 얼굴의 단정한 모습의 학생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언니 그냥 들어 오란께"
"아니 학생이 요런데 다녀도 된데, 난 심장 떨려서 못 들어가겄는디"
말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만, 이미 휘둥그래진 눈으로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새하얀 교복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땋은 그 둘은, 이목구비도 비슷하게 생긴 것이 아마 자매였을 것이다. 그 둘을 지켜 보던 것은 나뿐은 아니었다. 한 켠에서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던 남자애들 중 하나가 오 하는 작은 환호 소리를 뒤로하고 뚜벅뚜벅 그 둘로 다가갔다.
음악 소리에 묻혀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를 보니 남학생은 언니 쪽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언니 쪽은 그 껄렁한 모습의 남학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굳은 얼굴로 뭐라 쏘아 붙이더니, 바로 감상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귀까지 버얼개진 남학생은 뒤통수를 긁적이다,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알콩달콩한 모습을 기대했던 내게는 김새는 장면이었고, 읽던 책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섰다. 저 만치 길 한쪽에서는 그 여학생 둘 앞을 막고 서서 과장된 몸짓과 웃는 표정으로 한참을 이야기 하고 있는 남학생이 있었다. '꽤나 열심이구나'하며 열대 어딘가의 섬에 화려한 깃털로 암컷에 구애의 춤을 추는 새가 떠올랐다. 구애의 춤을 추는 그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 뜨거운 여름이 지나갈 때 쯤 이었을 것이다.
음악 감상실 문을 열고 작게 볼록 솟은 배를 숨기듯이 끌어안은 여자와 그녀의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들어 섰다. 잔뜩 화가난 표정으로 감상실을 둘러 보더니, 주인과 뭐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뭔가를 받아들고는 감상실을 나가버렸다. 그 시간 내내 그 여자는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았지만, 난 몇달 전 본 그 학생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받아 적어간 것은, 뱃 속의 작은 아이를 만든 책임을 묻기 위한 그의 전화 번호가 아니라, 이 작은 생명의 아버지로써 기쁜 소식을 하루라도 더 빨리 알게 되어 한 가정을 따뜻하게 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남학생도, 그 여학생도 그후로 다시는 음악감상실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어가는 계절이면 가끔 그 장면이 생각난다. 만일 그 둘이 그 날, 그 곳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얄굳은 운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