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40화

디지털 파수꾼

by 돌부처


밤 10시.

판교 테크노밸리. 잠들지 않는 도시.


수만 개의 불 켜진 창문들이, 거대한 벌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빌딩의 44층.

유리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아득하게 펼쳐진 그곳에, 박종윤의 연구소 ‘타임링크(TimeLink)’가 있었다.


띠리링.


서버실의 적막을 깨고, 낡은 2G폰 하나가 책상 위에서 진동했다.


박종윤은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는 수십억짜리 양자컴퓨터와 최첨단 장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 구닥다리 핸드폰만을 고집했다.

해킹이 불가능한, 가장 완벽한 통신 수단이었으니까.


“한지운…?”


발신인을 확인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학회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고고학자였다.

그런 그가, 이 ‘비상용’ 번호로 연락을 해왔다.


‘종윤아. 나 한지운이다. 도움이 필요해.’


짧은 문자. 하지만 그 안에는, 평소의 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박종윤은 즉시 자신의 메인 컴퓨터로 돌아갔다.

그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탁-


수십 개의 창이 동시에 뜨고 사라졌다.

경찰 내부망, 통신사 기지국, CCTV 통합관제센터.

그에게는 벽이 없었다.


“성북동에서 신호가 끊겼군.”


그는 한지운의 마지막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관련 뉴스를 검색했다.


[속보] 국립중앙박물관, 원인 불명 가스 누출 의심… 관람객 긴급 대피.

[단독] 재개발 지역 폐병원, 의문의 붕괴… 경찰, 테러 가능성 수사.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 양반은.”


박종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한지운이 단순한 학자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한상현 박사의 기이한 연구들.

그리고 지운이 가끔 털어놓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유물들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는 연구소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최고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지운이 올 만한 모든 경로의 CCTV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풍을 몰고 올, 오랜 친구를.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거대한 빌딩의 위용에 잠시 말을 잃었다.


“여깁니다.”


지운이 말했다.


“제 친구, 박종윤의 연구소입니다.”


‘가소롭군.’


왕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비웃었다.


‘고작 유리와 쇠로 쌓아 올린 탑이라니. 인간의 오만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지운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서화를 부축했다.

그녀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숨소리는 가늘어졌다.

부러진 팔의 상처 부위에서, 희미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왕의 패기에 노출된 상처가, 빠르게 괴사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두 사람은 건물의 지하 주차장을 통해,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운이 미리 알려준, 보안이 가장 취약한 경로였다. 하지만 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순간.


경고. 미등록된 생체 정보가 감지되었습니다.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천장에서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박종윤의 보안 시스템이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 위쪽의 작은 카메라가 두 사람을 비췄다.


“종윤아, 나다.”


지운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문을 열어줘.”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음성 및 홍채 정보 대조 완료. 환영합니다, 한지운 박사님.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44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박종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두 사람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박물관 유물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의 시선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서화에게 닿았다.


“그리고 이쪽은… 상처가 심각하잖아! 병원을 가지 않고 뭐하는거야?”

“그럴 시간 없어.”


지운이 그의 말을 잘랐다.


“여긴 안전한가?”

“우리나라에서 청와대 다음으로 안전할걸.”


박종윤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일단 들어와. 상처부터 치료해야지.”


그는 서화를 부축해, 연구소 안쪽의 의료 시설로 데려갔다.

그곳은 작은 수술실을 방불케 했다. 최첨단 의료 장비들이 즐비했다.


“단순 골절이 아니야.”


박종윤은 서화의 상처를 진단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뼈 주변의 조직이… 원인 모를 괴사를 일으키고 있어.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내가 하지.”


그때, 지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낮고 위압적이었다.

왕이었다. 그는 박종윤을 밀치고, 서화의 상처 앞에 섰다.


“지운?”


박종윤이 당황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등, 검푸른 옥 매미 문양을 서화의 상처 위에 가져다 댔다.


“왕의 상처는, 왕의 독으로 다스리는 법.”


그가 읊조렸다. 검푸른 기운이, 그의 손등에서 뿜어져 나와 서화의 상처로 흘러 들어갔다.


“크윽… 아악!”


서화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상처를 뒤덮고 있던 검은 기운이, 지운의 옥빛 기운과 충돌하며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것은 치료가 아니었다. 더 강한 독으로, 약한 독을 지워버리는 이독제독(以毒制毒).

그 순간이었다.


삐-삐-삐-삐-!


연구소 전체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박종윤이 놀라 메인 컴퓨터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건물의 모든 보안 시스템이 뚫리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리고 외부 CCTV 화면. 빌딩 1층 로비에, 검은 비단 도포를 입은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죽연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로비의 모든 전등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젠장, 뭐야! 내 시스템이!”


박종윤이 경악했다.


“왔군.”


지운, 아니 왕은 서화의 치료를 멈추지 않은 채, 차갑게 미소 지었다.


“잔치가 시작되려면, 손님들이 더 필요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 박종윤의 컴퓨터 화면이


치직-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진 화면.

그곳에는, 웃고 있는 죽연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기록자의 후예여.”


죽연의 목소리가, 연구소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숨바꼭질은 끝났다.”

“이제, 술래가 너희를 잡으러 갈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