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탑의 균열
“이제, 술래가 너희를 잡으러 갈 시간이야.”
죽연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연구소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꺼졌다.
퍽.
암흑.
오직 비상등의 희미한 붉은빛만이, 세 사람의 경악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박종윤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부심.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 모든 것이, 방금 전 단 몇 초 만에 산산조각 났다.
그의 철옹성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뚫렸다. 상대는 해킹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걸어 들어왔다. 마치 문이 없는 벽을 통과하듯이.
“하찮은 재주로군.”
왕의 목소리가, 지운의 머릿속에서 비웃었다.
“저런 쇠와 유리로 만든 탑 따위가, 어찌 짐의 신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왕은 여전히 서화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에게, 죽연의 침입은 성가신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박종윤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니야… 아직이야….”
그는 비상 전원으로 부팅되는 보조 컴퓨터로 달려갔다.
그의 손가락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네놈이 내 성에 들어왔을지는 몰라도, 여기서 나갈 수는 없어. 절대로.”
그는 건물의 모든 물리적 보안 시스템을 강제로 작동시켰다.
철컹! 쿵!
44층으로 향하는 모든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멈췄다.
비상계단의 방화 셔터가 내려왔다.
복도에는 할로겐 가스가 살포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단 1분도 버틸 수 없는 환경.
“어떠냐, 이 자식아….”
그가 숨을 헐떡이며 CCTV 화면을 다시 켰다.
화면 속, 죽연은 1층 로비 한가운데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가스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음미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인간의 독은, 이리도 싱겁군.”
죽연의 입모양이, 화면을 통해 선명하게 읽혔다.
그는 조롱하듯, 손가락 하나를 까딱했다.
콰과과광-!
연구소의 스피커에서, 끔찍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박종윤이 강제로 멈췄던 엘리베이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CCTV 화면 속, 엘리베이터는 1층과 최상층을 미친 속도로 오르내렸다.
와이어가 끊어지는 비명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이건… 해킹이 아니야….”
박종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물리적인 제어권을 무시하고 있어. 이건… 이건 그냥…”
박종윤은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헀다. 죽연은 천천히, 비상계단을 향해 걸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육중한 방화 셔터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뜯겨 나갔다.
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층, 한 층.
그가 지나는 층마다, 건물의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었다.
전등이 터지고, 스프링클러에서는 시커먼 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무실의 컴퓨터들은 일제히 꺼졌다가, 화면 가득 기이한 부적 문양을 띄운 채 다시 켜졌다.
이 거대한 첨단 빌딩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막아야… 막아야 해….”
박종윤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카드, 연구소 입구를 지키는 방어 시스템을 가동했다.
레이저 격자망, 고압 전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과잉 방어 시스템.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크윽…!”
그때, 서화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왕의 ‘치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팔, 검게 괴사하던 조직이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녀의 팔뚝, 파수꾼의 상징이었던 붉은 용의 문신이, 왕의 검푸른 기운에 오염되어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의 왕에게, 빚을 진 것이다.
마침내, 왕이 손을 뗐다. 서화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녀는 기력을 모두 소진한 채 정신을 잃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왕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딩-
바로 그 순간, 연구소 앞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주하던 모든 엘리베이터가, 44층에 멈춰 선 것이다.
박종윤은 경악하며 모니터를 보았다. 죽연은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그는 폭주하는 엘리베이터 중 하나를, 자신의 의지로 길들여 타고 올라온 것이다.
끼이이이익-
강화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연구소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박종윤의 마지막 방어 시스템은, 작동조차 하지 않았다. 죽연의 기운 앞에, 모든 기계가 복종한 것이다.
문이 열리고, 죽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 빌딩에서 일하다 과로로 죽어간, 수십 명의 원혼들이.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죽연이 미소 지었다.
“이 잔치에 어울리는 광대들을 불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