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45화

보이지 않는 전쟁

by 돌부처

사흘이 흘렀다.

판교의 유리탑 44층은, 세상과 단절된 섬이었다.


박종윤에게는 밤도 낮도 없었다. 그의 전쟁터는 수십 개의 모니터가 깜빡이는, 데이터의 바다였다.

한쪽에서는 링거를 맞으며 잠든 서화의 생체 신호를 체크했고, 다른 쪽에서는 왕이 내린 명령을 수행했다.

그는 왕의 신하였다. 동시에, 친구를 구하기 위한 스파이였다.

그는 왕이 명령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최민준 형사의 일거수일투족, 화천회의 자금 흐름, 죽연이 남긴 희미한 영적(靈的) 잔류파.

그는 그 모든 것을 왕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전부를 보고하지는 않았다.

그는 왕의 감시를 피해, 자신만의 ‘방화벽’을 쌓고 있었다.

왕이 보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새. 그곳에, 그는 반격을 위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왕은 대부분의 시간을, 유리창 앞에 서서 보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서화에게 최소한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그는 한지운이라는 그릇 안에서,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조율의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가끔, 그의 몸을 휘감는 검푸른 기운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면,

박종윤은 모니터 너머로 친구의 고통스러운 눈빛을 보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서울지방경찰청.


최민준 형사의 책상은, 이제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밤샘의 증거인 빈 커피 잔과 담배꽁초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한상현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밀 통로는, 근처의 낡은 하수관에서 끊겨 있었다.

CCTV는 교묘하게 편집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노이즈가 끼었다.

한지운과 의문의 여인은, 말 그대로 증발했다.

그들의 뒤에는, 모든 증거를 지워버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젠장….”


최 형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다시, 한상현의 책 『금단(禁斷)의 기록, 신물(神物)의 연대기』를 펼쳤다.

국회도서관에서 열람을 신청했지만, ‘전산 오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정보원을 총동원해 낡은 초판본 한 권을 손에 넣었다.

그는 책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었다. 역사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선배님.”


팀의 막내 형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상현 박사님… 그분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뭔가 나왔나?”

“학계에서 은퇴하신 후에, 이상한 모임을 만드셨더군요. 이름이… ‘월하(月下) 연구회’라고.”

“월하 연구회?”

“네. 실증사학이 아닌, 뭐… 풍수나 민속 신앙 같은 걸로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연락이 끊겼는데… 유일하게 한 분, 아직 생존해 계신 분이 있습니다.”


막내 형사가 내민 서류에는, 한 노인의 사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산(知山) 박인수. 前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최 형사의 남색 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


삐빅. 삐빅.


의료 장비의 기계음이, 단조롭게 울리고 있었다.

서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희미한 약품 냄새.

그녀는 부러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최첨단 의료용 깁스가, 팔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상처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팔뚝의 붉은 용 문신이 검게 변한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어났군요.”


박종윤의 목소리였다. 그는 링거를 확인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꼬박 사흘을 잤습니다.”

“여기는….”

“제 연구소입니다. 그리고 지운이는….”


박종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요.”


서화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 왕에게 잠식당한 상태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적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지운을 구하고, 이 미친 세상을 막는 것.


“방법이… 있습니까.”


박종윤이 먼저 물었다.


“내 친구… 지운이를 되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서화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기록자의 피는, 왕의 저주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저주를 봉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물쇠’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러려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쿵.


연구소의 문이 열리고, 왕이 들어섰다.

그의 몸을 휘감던 검푸른 기운은, 이제 완전히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한지운의 모습을 한 왕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의식을 차린 서화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회복이 빠르군. 파수꾼의 피는 쓸모가 있어.”


그는 다시, 박종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찾았는가.”


박종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메인 스크린에, 하나의 좌표를 띄웠다.

서울의 오래된 공업 지대. 지금은 폐허가 된, 낡은 제지 공장이었다.


“찾았습니다.”


박종윤이 보고했다.


“죽연이 남긴 잔류파와, 화천회의 자금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 그들의 ‘둥지’로 추정됩니다.”


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유리창 너머,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좋다.”


그가 선언했다.


“이제,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