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
“지금부터, 너는 짐의 것이다.”
선언.
그것은 질문도, 제안도 아니었다.
박종윤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수년간 알고 지낸 친구 한지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 그를 휘감은 압도적인 기운은, 박종윤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과학과 이성의 세계를 비웃고 있었다.
“뭐… 뭐라고…?”
그가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염소처럼 떨리고 있었다.
왕은 대답 대신, 의식을 잃은 서화를 안고 연구소 안쪽 의료 시설로 향했다.
그는 가장 깨끗한 침대에, 마치 귀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 박종윤을 돌아보았다.
“이 계집을 살려라.”
명령이었다.
“네놈의 그 번잡한 기계들을 이용해, 상처를 봉합하고 기력을 되찾게 해.”
“자, 잠깐만! 지운아! 이게 대체 무슨….”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왕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 하찮은 필부의 이름은, 이제 껍데기에 불과하다.”
순간, 왕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 깊은 검푸른 심연 속에서, 고통과 혼란에 찬 한지운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종윤아… 도망쳐….’
하지만 그 빛은 곧, 더 깊은 어둠에 잠식당했다.
박종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보았다. 자신의 친구가, 저 미지의 존재 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는 결심했다. 도망치는 대신, 알아내야만 했다.
자신의 친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겠습니다.”
박종윤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그는 의료 장비 앞으로 다가가, 서화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생체 신호는 위험할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왕이 행한 ‘이독제독’ 덕분인지, 상처 부위의 괴사는 멈춰 있었다.
“수혈과 영양 공급이 시급합니다. 뼈를 다시 맞추려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두어라.”
왕은 차갑게 말했다.
“저 계집은 아직 쓸모가 있으니.”
그는 파괴된 연구소를 둘러보았다. 마치 자신의 새로운 영토를 확인하는 왕처럼.
그는 박종윤의 메인 컴퓨터 앞에 섰다.
박살 난 냉각 장치, 깨진 홀로그램 패널.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깨진 패널 위로 검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새로운 창을 만들어냈다.
물리적인 화면이 아니었다. 그의 의지가, 데이터를 직접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것이, 네놈의 ‘눈’인가.”
왕은 박종윤이 구축해 놓은 전 세계의 CCTV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가소로운 장난감이지만, 지금의 짐에게는 쓸모가 있겠군.”
그는 박종윤을 향해 고갯짓했다.
“오너라, 나의 첫 번째 신하여.”
“지금부터, 짐의 눈과 귀가 되어라.”
박종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다가갔다.
왕은 허공에 떠 있는 데이터 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폐병원과 성북동 자택을 수사하고 있는 최민준 형사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비치고 있었다.
“저 벌레. 꽤나 성가시군.”
왕이 말했다.
“저놈의 모든 것을 알아내라. 저놈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짐에게 보고하라.”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창을 띄웠다.
그곳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도망쳤던 죽연의 마지막 행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저 배신한 개도 찾아내야지. 화천회. 감히 짐을 이용하려 한 어리석은 놈들. 그들의 ‘둥지’가 어디인지, 전부 알아내.”
그것은 명령이었다.
박종윤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도, 며칠은 족히 걸릴 방대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왕의 눈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하가, 해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박종윤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과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렸다.
대신, 그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위험한 동맹을 선택했다.
미쳐버린 왕의 신하가 되어, 이 거대한 사건의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왕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연구소의 거대한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 아래, 판교의 화려한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이 현대의 불빛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 자신이 잃어버렸던 왕국의 덧없는 풍경이었다.
“기다려라.”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짐이… 곧 돌아갈 것이니.”
그의 등 뒤에서, 박종윤의 키보드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혼란의 서곡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