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명령
왕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는 천둥 같은 권위가 담겨 있었다.
연구소를 뒤덮었던 도깨비들의 광기가, 일순에 얼어붙었다.
박종윤의 머리를 내려치려던 붉은 도깨비는, 쇠몽둥이를 든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 거대한 외눈에,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혼돈과 장난을 즐기는 이 고대의 존재들이,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의 근원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존재. 진정한 ‘왕’의 존재를.
“크… 크으….”
붉은 도깨비의 목에서, 겁에 질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연구소를 부수고 다니던 다른 도깨비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은 복종이라기보다, 포식자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피식자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주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죽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이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그는 왕의 망령을 자신의 ‘주군’으로 섬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천회의 계획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왕을 이용할 수 있는 ‘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깨운 것은 패가 아니라,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재앙 그 자체라는 것을.
“네놈이 저것들을 불렀는가.”
왕이, 처음으로 죽연을 돌아보았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는, 마치 심연처럼 깊었다.
“예… 예, 주군. 저 하찮은 필부들을 처리하기 위해….”
“하찮은 것은 네놈이다.”
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감히 짐의 앞에서, 너의 장난감을 자랑하는가. 이 연회의 주인은 짐이다. 광대는, 네놈 하나로 충분하다.”
왕은 도깨비들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했다.
“너희의 주인은, 저 가짜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도깨비들의 혼에 직접 울렸다.
“너희가 섬겨야 할 왕은, 바로 나다.”
“크아아아!”
도깨비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그것은 왕을 향한 충성의 맹세였다.
그들의 붉은 안광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했다. 자신들을 불러낸 주술사, 죽연.
“이… 이런…!”
죽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부린 사냥개들이, 이제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주군! 소인을 시험하시는 겁니까!”
“시험? 하하하.. 아니지. 처분이다.”
왕은 다시 의식을 잃은 서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더 이상 이 소란에 관심이 없었다.
“저 더러운 것을, 짐의 눈앞에서 치워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깨비들이 일제히 죽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쇠몽둥이가 공기를 갈랐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심장을 노렸다.
“감히 배신을!”
죽연은 비명을 지르며, 품에서 검은 부적 여러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부적을 허공에 뿌리자, 부적들이 검은 화염으로 변해 도깨비들을 덮쳤다.
키에엑!
몇몇 도깨비들이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었지만, 나머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흉포해져, 그의 팔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아악!”
죽연의 비단 도포가 찢겨나가고, 피가 튀었다.
그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듯, 마지막 남은 부적 한 장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귀환(歸還)’.
펑!
다시 한번, 검은 연기가 연구소 전체를 뒤덮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연기 속에서,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죽연은 자신의 살점을 대가로, 강제로 공간을 열어 도망치고 있었다.
연기가 걷혔을 때, 죽연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는, 그가 흘린 검은 피와 찢겨 나간 도포 자락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을 잃은 도깨비들은, 어쩔 줄 모르고 왕을 바라보았다.
“사라져라.”
왕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네놈들의 혼돈은, 짐의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도깨비들의 몸이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이야기 속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연구소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파괴된 기계들, 그리고 세 사람만이 남았다.
박종윤은 멍하니, 이 모든 비현실적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지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의 모습을 한, 저 압도적인 존재에게.
“너….”
박종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대체… 누구야….”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서화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박종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너는, 쓸모가 있겠군.”
왕이 말했다.
“지금부터, 너는 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