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月下)의 현자
“사냥이라….”
왕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한지운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짐이 직접 나서는 사냥은, 수백 년 만이로군.”
그는 박종윤이 띄워놓은 폐제지공장의 위성사진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건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록자의 눈, 그리고 왕의 눈으로. 그는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악의의 ‘색’과,
그 주변을 흐르는 지맥의 뒤틀림을 읽고 있었다.
“저곳은 단순한 둥지가 아니다.”
왕이 말했다.
“오래전, 역병에 걸린 시체들을 내다 버리던 구덩이가 있던 곳. 이 땅의 가장 추악한 기억이 묻힌 곳이군. 과연, 벌레들이 모여들 만해.”
그는 박종윤을 돌아보았다.
“길을 열어라, 나의 신하.”
“가장 빠른 길. 가장 은밀한 길로.”
“준비하겠습니다.”
박종윤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서울시 교통 통제 시스템, 지하 공동구 설계도, 통신망 지도.
수많은 데이터들이 그의 눈앞에서 조합되고 해체되었다.
그는 왕을 위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동시에, 그 길 어딘가에 자신만의 ‘뒷문’을 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서화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당신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의지는 단호했다.
“그곳은 화천회의 본거지. 함정일 겁니다.”
“함정이라.”
왕이 그녀를 돌아보며 비웃었다.
“사자가 쥐들의 함정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하지만, 길안내를 할 하인은 필요하겠지.”
그는 서화의 검게 변한 팔뚝을 보았다.
“네년의 몸에 흐르는 짐의 독이, 화천회의 악의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하군.”
그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화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왕은 지금, 한지운의 지식과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융합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한지운의 영혼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같은 시각.
경기도 외곽, 오래된 한옥 한 채.
최민준 형사는 삐걱거리는 툇마루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지산(知山) 박인수. 한상현의 옛 동료이자, 월하 연구회의 마지막 남은 자.
“그래서,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지산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눈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맑고 깊었다.
“자네의 그 남색 눈으로, 이 늙은이에게서 무엇을 읽고 있는가.”
최 형사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오는 내내, 이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르신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내가 뭘 말인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말입니다.”
지산은 대답 대신, 찻잔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별자리가 흐트러지고, 땅의 용이 신음하고 있네. 눈과 귀가 있다면,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다시 최 형사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그것을 ‘보는’ 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지. 자네처럼.”
“한상현 박사님. 그리고 한지운 박사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최 형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분들이 남긴 ‘기록’. 그것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습니다.”
“기록이라….”
지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박사는 위대한 기록자였네. 하지만 너무 외로웠지. 진실을 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으니.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마지막 기록에 담아,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네.”
“그의 손자, 한지운에게 말이군요.”
“그 책… 『금단의 기록』. 그 책은 대체 뭡니까.”
“그것은 책이 아닐세.”
지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지도’이자, ‘자물쇠’일세. 이 땅의 운명을 건, 거대한 보물찾기의 지도. 그리고 동시에,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잠그는, 마지막 자물쇠.”
그는 최 형사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네는 지금, 그 보물찾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걸세. 자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천회는… 대체 어떤 집단입니까.”
“가장 오래된 반역자들.”
지산이 말했다.
“하늘의 질서를 부정하고, 땅의 혼돈을 숭배하는 자들. 그들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닐세. 그들은 신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새로운 신이 되려는 게지.”
“그리고 그들의 계획이,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네.”
그는 품에서 낡은 나침반 하나를 꺼내, 최 형사 앞에 내려놓았다.
서화가 가진 패철과 비슷했지만, 중앙의 거북이가 옥으로 되어 있었다.
옥 거북이는, 미친 듯이 맴돌고 있었다.
“이 땅의 모든 맥이, 지금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네.”
지산이 나침반을 보며 말했다.
“곧, 거대한 ‘문’이 열릴 게야. 그리고 그 문이 열리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맑던 눈에, 처음으로 깊은 슬픔이 어렸다.
“어르신.”
최 형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지산은 대답 대신, 최 형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자네는 경찰이네. 법을 지키는 자지.”
“하지만 기억하게. 때로는,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법을 어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는 최 형사의 손에, 작은 나무패 하나를 쥐여주었다. 나무패에는, ‘風(바람 풍)’ 자가 새겨져 있었다.
“때가 되면, 이것이 자네의 길을 열어줄 걸세.”
그 순간, 최 형사의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팀장님! 서울 전역의 교통 통제 시스템이 마비됐습니다! 누군가… 누군가 도시 전체를 해킹하고 있습니다!”
최 형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산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보게.”
지산이 말했다.
“이제, 자네의 '일'이 시작될 시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