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혈관
“길이 열렸습니다.”
박종윤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눈은 기묘한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모든 혈관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신호등, 지하철, CCTV, 통신망. 그 모든 것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시에,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절대적인 통제력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수고했다.”
왕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서화를 부축해 일으켰다.
“가자.”
“잠깐.”
박종윤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는 작은 통신 장치 하나를 서화의 옷깃에 붙여주며, 왕을 향해 말했다.
“이건… 비상용 통신 장치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왕은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미소 지었다.
“갸륵하군. 신하의 충심이.”
그는 통신 장치를 제지하지 않았다.
하찮은 벌레의 발버둥 따위는, 그의 계획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자신감.
“네놈은 여기서, 짐의 눈이 되어라.”
왕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저 벌레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고, 화천회의 쥐새끼들이 다른 굴을 파는지도 감시해.”
“그리고….”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짐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이 탑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인간이든, 귀신이든.”
왕은 서화를 이끌고, 연구소의 비상 탈출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것은 건물의 가장 깊은 곳, 지하 공동구(共同溝)와 직접 연결된 유일한 통로였다.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의 세상은 다시 나뉘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도시의 가장 깊은 혈관이었다.
거대한 지하 공동구. 전력, 통신, 상하수도.
서울의 모든 생명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거대하고 어두운 미로.
공기 중에는 오존 냄새와 축축한 흙먼지가 뒤섞여 있었다.
“이곳이, 이 시대의 ‘맥(脈)’인가.”
왕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용의 혈맥 대신, 쇠와 구리의 혈관이라. 조잡하지만, 쓸모는 있겠군.”
그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였다.
전력선에서 흐르는 푸른빛의 에너지. 통신 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수억 개의 정보의 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아래, 이 인공의 길과 뒤섞여 흐르는, 오염된 땅의 검붉은 지맥.
서화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왕의 독이 주입된 팔은, 이제 고통스럽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감각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지운처럼은 아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기운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왕의 모습은, 거대한 검푸른 태풍이었다.
그 중심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한 점의 흰빛.
한지운의 영혼.
‘아직… 살아있어.’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싸움이 끝나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 검푸른 어둠 속에서 그를 꺼내와야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왕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앞을, 거대한 환풍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위이이잉-
엄청난 소음과 함께, 지상으로 향하는 바람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불어왔다.
“길이 막혔군.”
‘아니. 길이 아니야.’
순간, 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지운의 의식이, 그의 틈을 비집고 나왔다.
“이건… 길이 아닙니다. ‘함정’이에요.”
지운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환풍기 너머, 공기의 흐름 속에 섞여 있는 미세한 ‘기록’을 읽어냈다.
죽연이 남긴, 악의에 찬 주술의 흔적.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환풍기의 날개가 멈췄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지상의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화천회의 둥지에서부터 불어오는, 죽음의 바람이었다.
바람에는 수천 개의 비명과,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바람에 닿는 순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영혼까지 부패할 터였다.
“어리석은 놈!”
왕이 다시 지운의 의식을 억누르며 포효했다.
“네놈의 하찮은 감상 때문에, 짐의 행차가 지체되지 않았느냐!”
그는 손을 들어, 죽음의 바람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바람은 그의 패기마저 뚫고, 두 사람을 덮쳐왔다.
그 순간. 서화가 움직였다. 그녀는 왕의 앞을 막아서며, 자신의 검게 변한 팔을 바람 속에 내밀었다.
“왕의 독은, 왕의 독으로.”
그녀는 왕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그녀의 팔에서 뿜어져 나온 검푸른 기운이, 죽음의 바람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두 개의 거대한 악의가, 서로를 집어삼키며 상쇄되기 시작했다.
“크… 아…!”
서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왕은 그 모습을, 경악과 흥미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심어놓은 ‘독’이, 자신을 구한 것이다.
“과연… 파수꾼의 후예로군.”
바람이 멎었을 때, 서화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팔은 너덜너덜해졌지만, 두 사람은 살아남았다.
왕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환풍기 너머, 이제 그들의 눈앞에.
폐제지공장의 거대한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