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48화

텅 빈 둥지

by 돌부처

환풍기 너머의 공기는 죽어 있었다.


오래된 종이가 썩는 냄새와, 축축한 곰팡내, 그리고 쇠가 녹스는 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왕은 망가진 환풍기 날개를 가볍게 밟고, 폐제지공장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그는 쓰러진 서화를 부축하지 않았다. 그저, 뒤따라오라는 무언의 명령만을 남긴 채.


서화는 너덜너덜해진 팔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에 비친 공장은, 거대한 시체의 뱃속과 같았다.

녹슨 기계들은 짐승의 뼈처럼 앙상했고, 바닥에 쌓인 종이 더미는 썩어가는 살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밖에서 느껴졌던, 그 거대하고 사악한 기운이.

이 안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그릇의 내용물만 쏙 빼내간 것처럼.


“장난질을 쳤군.”


왕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그 역시 깨달은 것이다.

이곳은 둥지가 아니다. 그저, 둥지였던 ‘흔적’일 뿐.


두 사람은 공장의 가장 깊숙한 곳, 거대한 윤전기가 서 있던 중앙 홀에 도착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바닥에, 거대한 진(陣)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피와, 짐승의 내장으로 그린 듯한, 끔찍하고 불길한 문양.

하지만 진은 이미 그 힘을 다한 뒤였다.

중심부에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뒤에 남는 검은 재만이 쌓여 있었다.


‘이건….’


그 순간, 지운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왕의 눈을 통해, 진의 구조를 읽어냈다.


‘공격이나 방어 진이 아니야. 이건… 에너지를 한곳에 모아, 다른 곳으로 보내는… 송신탑 같은 거야.’


“함정이었나.”


왕이 분노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감히, 짐에게??”


그는 자신이 죽연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천회는 왕이 이곳, 폐제지공장에 집중하는 사이.

이곳에 모아두었던 모든 악의와 원념을, 다른 어딘가로 보내버린 것이다.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그때였다.


치지직-


서화의 옷깃에 숨겨져 있던 작은 통신 장치에서, 박종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려요? 서화 씨! 지운아!”

“함정이야! 젠장, 나까지 속았어!”

“종윤 씨!”


서화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에너지! 너희가 있던 곳의 영적 에너지가 전부 사라졌어! 그리고….”


박종윤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떨렸다.


“방금, 서울의 다른 곳에서 훨씬 더 거대한 규모로 다시 나타났다고!”

“이건… 이건 차원이 달라! 도시 전체의 지맥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어딥니까!”

“그곳이 어디예요!”


박종윤은 대답 대신, 서화의 낡은 스마트폰으로 좌표 하나를 전송했다.

지도 위에, 붉은 점 하나가 섬뜩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곳은 고궁도, 박물관도 아니었다.

서울의 변두리.

수년 전, 부실공사와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흉물로 방치된, 거대한 주상복합 쇼핑몰이었다.

수천억의 욕망과, 수백 가구의 파산한 꿈이 뒤엉킨, 현대의 무덤.


“과연….”


왕의 입가에, 분노와 함께 기묘한 흥미가 뒤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고대의 원념이 아니라, 현대의 절망을 제물로 삼겠다? 제법이군, 화천회.”


그는 자신의 손등, 옥 매미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새로운 왕의 기억이 속삭이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을 비춘다….’


청계천이 아니었다.

가장 낮은 곳이란, 인간의 가장 추악한 욕망이 추락한, 바로 저곳이었다.


“이제야, 진짜 잔치가 시작되겠구나.”


그가 몸을 돌려 공장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공장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수십 개의 인영(人影)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죽연처럼 화려한 도포를 입지 않았다. 남대문 시장의 집사처럼 늙지도 않았다.

그들은 검은 작업복 차림의, 얼굴 없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녹슨 쇠 파이프와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무기에는, 검붉은 기운을 내뿜는 부적이 감겨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록자의 후예, 그리고….”


그의 텅 빈 눈이, 왕을 향했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낡은 왕이여.”


그는 품에서 작은 나침반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나침반이 깨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공장 전체를 감싸는 결계를 형성했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주인 어르신께서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


남자가 선언했다.


“너희의 죽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축하하라고 하셨다.”


수십 명의 화천회 암살자들이, 소리 없이 두 사람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왕의 사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