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분노
“사냥이라.”
왕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닌, 지독한 모멸감이 서려 있었다.
사자가, 자신을 둘러싼 하이에나 떼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
암살자들은 감정이 없었다. 그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교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왕을 죽인다’는 단 하나의 명령어로 움직이는, 살인 인형에 가까웠다.
그들의 몸에서는 희미한 약품 냄새와 함께, 죽은 자의 색인 잿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경계의 존재들.
“고작 이런 것들로, 짐을 상대하겠다?”
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 늙은 여우는, 짐을 너무 얕보았군.”
그의 말이 끝나자, 암살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소리 없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칼날과 묵직한 쇠 파이프가, 왕의 급소를 향해 파고들었다.
단순한 물리적 공격이 아니었다.
무기에 감긴 부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기운이, 살아있는 자의 영혼을 찢어발기는 저주를 품고 있었다.
“안 돼!”
서화가 비명을 지르며, 부러지지 않은 팔로 왕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왕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암살자들의 칼날이 그의 심장에 닿기 직전.
쿠우우우우우웅-
세상이 울렸다. 왕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패기(霸氣).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왕의 권능.
콰직! 쨍그랑!
달려들던 암살자들의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부서져 내렸다.
그들의 몸을 이루던 뼈마디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크… 으윽….”
몇몇 암살자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텅 비었던 눈에, 고통과 공포가 떠올랐다.
왕의 패기는, 그들을 묶고 있던 화천회의 주술마저 깨뜨리고 있었다.
“보아라, 파수꾼.”
왕이 눈을 뜬 채, 서화를 돌아보았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옥새처럼 장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진짜 힘이다. 너희가 지키려는 그 하찮은 감정놀음과는 격이 다른, 절대적인 지배.”
그가 손을 들어, 암살자들을 향해 가볍게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콰드드드득-!
암살자들의 몸이, 보이지 않는 손에 쥐어짜이는 깡통처럼 찌그러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 그들의 몸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잿빛 영혼이 빠져나왔다.
‘그만….’
그 순간이었다. 왕의 머릿속에서, 한지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그들도… 피해자야….’
기록자의 눈이, 저들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가족의 병원비를 위해, 빚더미에 앉아, 마지막 희망을 찾아 화천회에 몸을 의탁했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절망이, 저들을 괴물로 만든 것이다.
“닥쳐라!”
왕이 포효했다.
“동정 따위는 패배자들의 자기 위안일 뿐이다! 저들은 적이다!”
왕의 의지와 지운의 공감이, 다시 격렬하게 충돌했다.
왕의 몸을 휘감던 검푸른 패기가,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허공에 붙잡혀 있던 암살자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지금이다!”
암살자들을 이끌던, 얼굴 없는 남자가 외쳤다. 그는 이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검은 흙으로 빚은 듯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른 무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독한 악의가 응축된 주물(呪物).
그는 자신의 심장을, 그 단검으로 찔렀다.
푹.
그는 비명 대신,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이 검은 화염에 휩싸이며, 한 자루의 검은 화살로 변했다.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모두 바쳐, 왕을 죽이기 위한 마지막 한 발.
슈우우우욱-!
검은 화살이, 공간을 가르며 왕의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너무나도 빠른, 피할 수 없는 공격.
‘어리석은….’
왕은 혀를 찼다. 그는 지운의 저항을 억누르며, 다시 패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순간. 쓰러져 있던 서화가 움직였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바닥에 떨어진 쇠 파이프 하나를 왕의 앞으로 던졌다.
카아아앙-!
쇠 파이프가 검은 화살의 경로를 미세하게 비틀었다.
화살은 왕의 심장을 비껴, 그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크…윽…!”
처음으로, 왕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지운의 몸. 그 필멸자의 육체가, 고대의 저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어깨에서부터, 검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네년이… 감히…!”
왕의 분노한 눈이, 서화를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공장의 부서진 천장. 그 너머의 밤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야… 왔군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공장의 지붕이
콰과과광
소리와 함께 뜯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헬리콥터의 서치라이트가, 무대 조명처럼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검은 특수부대원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낡은 트렌치코트의 사내.
최민준 형사였다.
그의 손에는 권총 대신, 지산에게 받은 ‘風’ 자가 새겨진 나무패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람의 힘을 빌어, 화천회가 쳐 놓은 결계를 찢어발긴 것이다.
“한지운.”
최 형사의 남색 빛 눈동자가,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비틀거리는 왕을 향했다.
“드디어, 만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