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전쟁 (神戰)
꽈앙!
북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가 깨어지는 소리였다. 자정. 북극성의 빛이 제단의 북을 비추는 순간, 죽연이 내리친 북소리는 물리적인 음파를 넘어,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를 이루던 ‘막’을 강타했다. 모든 것이 멈췄다. 쏟아져 들어오던 특수기동대원들의 움직임이, 공중으로 흩날리던 섬광탄의 불꽃이, 심지어는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그리고. 균열이 생겼다. 아트리움의 허공, 그 중심부에 보이지 않는 유리가 깨지듯, 검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풍경이 보였다. 끝없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마치 행성처럼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번뜩이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열렸다….”
“마침내…!”
화천회의 주인, 백발의 노인과 죽연의 얼굴에 광신적인 희열이 떠올랐다. 천 년의 기다림. 그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막아야 해….’
벽의 틈새에서, 지운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북소리가 만들어낸 압도적인 압력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안에 잠든 왕조차, 이 초월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이 아니구나.”
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경외와 함께 아주 희미한 공포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이 세상보다 더 오래된, 태초의 혼돈 그 자체다.”
균열은 점점 더 커졌다. 틈새 너머의 어둠이, 마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처럼 이 세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부패하고 스러져갔다. 아트리움의 철골 구조물이 녹슬어 가루가 되었고, 바닥의 핏빛 호수는 생명력을 잃고 썩은 늪으로 변해갔다.
“안 돼!”
최민준 형사가 비명을 질렀다.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총을 들어 균열을 향해 쏘아댔지만, 총알은 균열에 닿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모두 후퇴! 여길 벗어나야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어둠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아트리움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하하하하!”
노인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라,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새로운 신께서 너희의 하찮은 육신과 영혼을 거두어, 위대한 혼돈의 일부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핏빛 호수 아래에서 꿈틀거리던 거대한 무언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용도, 뱀도 아니었다. 수백 명의 시체가 뒤엉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었다. 희생된 화천회 신도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신을 맞이하기 위한 옥좌(玉座). 거대한 손이, 하늘의 균열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신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이제… 끝인가….’
지운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의 눈에, 어둠에 잠식당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최민준과 장서린.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박종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결계를 펼치려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서화. 모든 것이, 흑백의 느린 필름처럼 흘러갔다. 절망. 그의 영혼이, 압도적인 절망 앞에 부서져 내리려던 순간.
“아니.”
지운이 속삭였다. 아니, 그것은 한지운의 목소리도, 왕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품고 있던 모든 ‘기록’들의 목소리였다. 이름 없는 어미의 사랑. 아기의 첫 울음.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눈물.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그의 영혼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의 손등, 깊은 옥색으로 잠들어 있던 옥 매미의 문양이,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의 검푸른 빛도, 한지운의 순백의 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모든 색을 머금은, 무지갯빛이었다. 그는 일어섰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가, 하늘의 균열을, 그리고 그 너머의 거대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이, 신이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왕의 위엄과, 기록자의 지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좋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놀아보자꾸나.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그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 수장고에서 놓쳐버렸던, ‘사인검(四寅劍)’이 금빛으로 타오르며 나타났다. 금빛이, 어둠을 갈랐다. 수장고에서 사라졌던 왕의 검, 사인검(四寅劍)이 지운의 손안에서 태양처럼 타올랐다. 그 빛은 단순한 광채가 아니었다. 이 땅에 기록된 수천 년의 의지(意志) 그 자체였다. 이름 없는 어미의 희생, 절망 속에서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 나라를 지키려 스러져간 병사의 함성. 그 모든 기록이 하나가 되어, 태초의 혼돈에 맞서는 거대한 방패가 되었다. 아트리움을 집어삼키려던 검은 어둠이, 금빛에 밀려 주춤거렸다. 공간을 짓누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저건….”
최민준 형사는 총을 든 채 굳어버렸다. 그의 남색 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보았다. 한지운의 몸을 휘감은 무지갯빛 오러와, 그가 쥔 검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황금빛을.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죽연의 얼굴에서 광신적인 희열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당혹과 분노, 그리고 아주 희미한 공포가 어렸다. 자신들이 그토록 불러내려 했던 ‘왕’의 힘. 하지만 지금 저 힘은, 자신들의 통제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가장 경악한 것은, 화천회의 주인이었다.
“네놈….”
백발 노인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네놈이 감히, 기록의 힘을 완전히 각성했단 말이냐!”
그는 깨달았다. 한지운의 영혼이 왕의 망령에 저항하며 만들어낸 균열. 그 틈새로, 이 땅의 모든 기록이 흘러들어 가, 두 개의 존재를 넘어선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계획에 없던, 최악의 변수였다. 하늘의 균열. 그 너머의 거대한 눈동자가, 처음으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자신 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의 등장을 인지한 것이다.
크르르르르르….
균열 너머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의 촉수 하나가, 채찍처럼 날아와 지운을 향해 쏘아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순수한 혼돈의 힘이었다. 지운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사인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에서,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사라져라.”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검격(劍擊)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에서, 이 땅의 역사가 빛이 되어 쏘아졌다. 황금빛 검기가 어둠의 촉수와 허공에서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소리 없는 폭발. 빛과 어둠이 부딪힌 자리에,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어둠의 촉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처럼 스러져갔다. 하지만 지운 역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버텨…!”
“버텨야 해!”
벽의 틈새에서, 박종윤과 서화가 절규하듯 외쳤다. 서화는 부러진 팔의 고통도 잊은 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파수꾼의 진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지운의 힘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박종윤은 미친 듯이 태블릿을 두드렸다. 그는 이 비현실적인 전투의 데이터를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했다. 저 힘의 파동, 에너지의 흐름. 그 안에, 아주 미세한 ‘규칙’이 있을 터였다.
“어리석은 것!”
백발의 노인이 외쳤다. 그는 이대로 자신의 천 년 숙원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죽연! 저 필부에게 깃든 왕의 힘을 폭주시켜라! 그릇이 깨어지면, 그 안의 모든 것도 부서질 터!”
죽연은 명령에 따라, 품에서 검붉은 옥 매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운에게 심었던 것과 똑같은, 하지만 훨씬 더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물건이었다. 그가 옥 매미를 부수려던 순간.
“네 상대는, 나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렸다. 최민준이었다. 그는 어느새, 특수기동대원들과 함께 제단 아래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의 남색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괴물을 잡는 것은, 언제나 괴물의 몫이었지.”
장서린 역시 핏빛 호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손’의 구조를 해부하듯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 시체들의 결합 구조… 단순한 주술이 아니야. 신경과 근육 조직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어. 저 손의 ‘핵심’을 끊어내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는 신과 신이 된 자가. 땅에서는 인간과 괴물이 된 자들이. 각자의 신념과 절망을 걸고, 이 세상의 마지막 밤 속에서 격돌했다. 균열 너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분노했다. 이번에는 촉수가 아니었다. 균열 자체가, 거대한 입처럼 벌어지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트리움 전체가, 진공청소기 앞으로 끌려가는 먼지처럼 균열을 향해 휩쓸려 들어갔다.
‘이곳에서 싸워서는… 세상이 먼저 부서진다.’
지운은 깨달았다. 이 좁은 무대에서, 두 신이 힘을 겨룰 수는 없었다. 그는 사인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모두를 돌아보았다.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서화. 절망 속에서도 데이터를 분석하는 박종윤. 인간의 몸으로 괴물에게 맞서는 최민준과 장서린. 그들의 눈에,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새겨 넣듯이.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의 균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땅의 모든 기록을 품은 하나의 빛이 되어, 태초의 혼돈 속으로.
“가서… 끝을 보자꾸나. 너와 나의 세상에서.”
빛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지운의 몸이 하늘의 균열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지운 씨!!!!!!!!!!!”
서화의 절규가, 텅 빈 아트리움에 메아리쳤다. 그를 집어삼킨 균열은, 마치 만족했다는 듯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세상을 빨아들이던 끔찍한 흡인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트리움에 남겨진 모두는, 그저 멍하니. 하늘에 남은 흉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균열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그 틈새로 마지막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운의 것도, 왕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태초의 혼돈이 내뱉는, 순수한 조롱이었다.
‘환영한다, 새로운 장난감이여.’
그리고.
완벽한 정적.
한지운의 의식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이곳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위도 아래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혼돈의 바다. 그의 육체는 사라졌다. 그는 이 땅의 모든 기록을 품은, 하나의 빛나는 영혼이 되어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색이 없는 색, 소리가 없는 소리, 존재하지 않는 존재. 인간의 뇌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태초의 정보들이 그의 영혼을 찢어발기려 했다.
‘버텨라.’
왕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 속에서 울렸다.
‘이곳은 저놈의 정신세계. 놈의 ‘기록’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네놈의 의지를 잃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저놈의 일부가 될 뿐이다.’
왕의 말대로였다.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눈동자는, 그저 창문일 뿐이었다. 이 세계 전체가, 바로 신(神) 그 자체였다. 지운은 사인검을 고쳐 쥐었다. 검이 뿜어내는 황금빛이, 혼돈의 바다 속에서 그를 지키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기록’을 끌어모아, 이 혼돈의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어미의 사랑으로, 형태 없는 어둠에 ‘따스함’을 기록했다. 아기의 첫 울음으로, 소리 없는 공간에 ‘생명’을 기록했다. 병사들의 함성으로, 끝없는 공허에 ‘의지’를 기록했다. 그가 기록을 새길 때마다, 혼돈의 신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이것은 힘과 힘의 싸움이 아니었다. 두 개의 세계관. 두 개의 역사.
서로 다른 ‘기록’을 가진 두 존재가, 서로를 지워버리기 위해 벌이는 영혼의 전쟁이었다.
한편.
지상의 아트리움.
하늘의 균열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희미한 공간의 뒤틀림이 남아, 불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태초의 혼돈으로 향하는 ‘문’은, 이제 영원히 열려버린 것이다.
“끝났나….”
죽연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계획이 틀어졌다는 분노와 함께, 저 미지의 존재를 목격한 원초적인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힐끗, 자신의 주인을 보았다. 백발의 노인은, 하늘의 흉터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그가 뱉은 말은, 지운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자조였다.
“감히 필부의 그릇에, 왕의 영혼을 담으려 했던 나의 오만함이. 결국, 호랑이를 깨우고 말았구나.”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돌아간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미련이 없었다. 그의 위대한 계획은, 최악의 형태로 실패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저 하늘 너머에서, 새로운 신이 되어버린 존재를 상대할 방법을. 그는 죽연과 남은 화천회 무리를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반대편. 최민준 형사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는 방금, 인류의 상식을 벗어난 거대한 전쟁을 목격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모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건….”
장서린이 그의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에요.”
그녀의 과학은, 눈앞의 현실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아니.”
최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남색 눈동자가, 다시 차가운 빛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감당해야만 하는 사건이 된 거야.”
그들은 이제 단순한 경찰과 법의학자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을 목격한, 최초의 증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밤에 맞서 싸워야 할, 마지막 파수꾼들이었다.
“지운아….”
박종윤은 무너진 통로 입구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잃었다. 그의 모든 기술과 지식은, 친구의 희생 앞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화였다. 그녀는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하늘에 남은 흉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아주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황금빛 하나가 보였다. 자신이 아는, 그 고집 센 학자의 빛이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하늘의 균열이 마지막 상처를 닫은 후, 아트리움에 남은 것은 지독한 정적과,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무함뿐이었다. 먼지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의 찬 공기가, 마치 거대한 무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최민준 형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제 희미한 흉터처럼 남은 공간의 뒤틀림이 보였다. 저 너머에서, 한 남자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는 방금 인류가 목격한 가장 위대한 희생을, 이제 자신의 손으로 덮어야만 했다.
그의 주변으로, 살아남은 특수기동대원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정예 요원들이었다. 수많은 총격전과 테러 현장을 겪으며 단련된 강철 같은 정신력. 하지만 그들의 눈은 지금, 길 잃은 아이처럼 공허했다. 그들은 방금, 자신들의 총알이 먼지가 되고, 동료 몇몇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검은 어둠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의 이성과 훈련된 정신력은, 이 비현실적인 공포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팀장님….”
한 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의 손에 들린 소총은, 이제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이… 이건 대체… 뭡니까. 저희는… 뭐라고 보고해야 합니까.”
보고. 최민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하늘이 찢어졌고, 웬 남자가 빛의 검을 들고 그 안으로 사라졌습니다.’라고? 당장 정신병원에 처넣어질 보고서였다. 아니, 그전에 상부의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진실은 영원히 묻히게 되겠지.
“모든 통신 장비를 꺼.”
최 형사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지금부터, 여기서 본 모든 것을 잊어. 이건 원인 불명의 대형 가스 폭발로 인한 건물 붕괴 사고다.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었고, 우리는 그들을 진압했다.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 알았나.”
그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의 ‘법’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 가장 거대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 모순된 운명의 중심에 섰다. 그는 이 세상의 비밀을 짊어진, 또 다른 의미의 파수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의 시선이, 아트리움 반대편으로 향했다. 무너진 통로 입구. 그곳에 서 있는 세 사람. 박종윤은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윤서화는 피투성이의 몸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 방탄조끼를 입은 채 굳어버린 장서린. 최민준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네 사람은 이제, 같은 지옥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들이었다.
“지운이가….”
박종윤이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은, 친구를 구하지 못한 무력한 첨단 기술의 상징처럼 보였다.
“내 친구가… 저 안으로… 혼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서화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꺾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길을 찾으려는 파수꾼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싸우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도 싸워야죠. 그가 돌아올 길을, 우리가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녀의 말에, 최민준이 걸음을 멈췄다.
“길이라고…?”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성적인 경찰로서의 회의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고 싶은 인간으로서의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되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서화는 대답 대신, 하늘의 흉터를 가리켰다.
“저 문은, 이제 영원히 열렸습니다. 화천회가 다시 저 문을 이용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그리고….”
그녀의 눈이, 최민준의 등 뒤에 선 장서린을 향했다.
“저 문을 통해, 다른 것들이 넘어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죠. 저것보다 더 끔찍한 것들이.”
장서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떨었다. 그녀는 법의학자였다. 그녀의 세계는 죽음으로 끝났다. 시신은 말이 없고, 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았다. 과학과 논리가 산산조각 나는 아수라장을 목격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은 재를 쓸어 담았다. 희생된 화천회 신도들이 남긴 흔적. 차갑고, 건조한 입자.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는, 그 안에 담긴 광기와 절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각기 다른 세상에 서 있던 그들이, 하나의 거대한 진실 앞에서 마주 선 것이다.
파수꾼, 기록자의 조력자, 경찰, 그리고 과학자. 이 기묘한 조합이야말로, 다가올 혼돈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팀이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최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무력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총을 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총알은 저들에게 통하지 않았소.”
“당신은 ‘법’으로 싸우세요.”
서화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빛났다.
“화천회는 이 세상에 뿌리내린 거대한 악입니다. 그들의 자금줄, 유령 회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신도들. 당신의 권한으로 그들의 뿌리를 찾아내 흔들어주세요. 저들은 괴물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법 아래 움직이니까요.”
그녀는 이어서, 박종윤을 보았다.
“종윤 씨, 당신은 ‘기술’로 싸워요. 이 세상의 모든 눈과 귀가 되어,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찾아내세요. 저들은 주술을 쓰지만, 동시에 인터넷으로 자금을 옮기고, 위성 전화로 연락을 합니다. 그 틈을 파고드세요.”
그녀의 시선이 장서린에게 향했다.
“서린 씨, 당신은 ‘진실’로 싸워야 합니다. 저들이 남긴 흔적, 그 시체들이 말하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해주세요. 세상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를 만드세요. 당신의 분석은, 이 모든 비현실적인 싸움을 현실에 발 디디게 할 유일한 밧줄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서화는 자신의 검게 변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왕이 남긴 독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힘이 되어버린 저주의 흔적.
“나는, 나의 방식으로 싸우겠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때였다. 박종윤의 태블릿에서, 희미한 경고음이 울렸다.
“이건….”
그는 놀라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파동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었다. 파동의 진원지는, 하늘에 남은 흉터였다. 그것은 전파도, 방사선도 아니었다. 그의 모든 센서가 처음 보는, 미지의 신호였다.
둥.
둥.
둥.
아주 희미하지만, 규칙적인 신호.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심장 박동…?”
장서린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법의학적 지식이, 저 패턴에서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아니.”
서화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아주 희미한 황금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돈의 어둠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빛이었다.
“저건… 신호가 아니에요.”
그녀의 입가에, 처절한 싸움 속에서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저건… 등대예요. 그가, 저 혼돈의 바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기록을 태워 빛을 내는, 필사의 등불이에요.”
네 사람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천회는 물러갔다. 신은 봉인되지 않았지만, 세상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한 남자가 모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그 자리에서, 남겨진 자들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맺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니,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마지막 파수꾼이 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