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55화

신의 놀이터

by 돌부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목소리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박종윤은 다급하게 다른 채널들을 검색했다.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SNS는 원인 모를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과, 기괴한 빛으로 물든 서울 하늘 사진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영상에는 웃으며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 허공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는 사람 등, 도시의 신경망 자체가 패닉에 빠져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 가득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염….”


벽에 기대앉아 있던 서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영적인 오염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어요.”


그녀의 눈에는, 단말기가 전하는 소음 너머의 것이 보이고 있었다.


“저 빛은 오로라가 아니에요. 화천회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찢어놓은 겁니다. 저 거대한 ‘상처’를 통해, 죽은 자들의 절망과 망각의 강물이 산 자들의 세상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한강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자살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부름’을 듣고 있는 겁니다. 화천회가 열어젖힌 문틈으로, 뱃사공 같은 ‘수확자’들이 몰려들어 길 잃은 영혼들을… 마치 잘 익은 과일처럼 ‘사냥’하고 있는 거예요.”

“화천회….”


지운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놈들이, 다른 버러지들까지 끌어들일 판을 벌였군.”


그의 머릿속으로, 폐제지공장에서 보았던 거대한 ‘송신탑’의 진(陣)이 떠올랐다. 그들이 뱃사공과 싸우는 동안, 화천회는 그곳에 모아두었던 모든 악의를 증폭시켜, 도시의 가장 약한 곳, 현대의 절망이 응축된 그 폐쇼핑몰에서 터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가, 지금 서울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감히…!’


왕의 분노가, 그의 영혼 속에서 다시 들끓었다.


‘이것은 짐의 왕국이다! 짐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짐의 백성을 탐할 수 없다!’


그는 분노했다. 자신의 놀이터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멋대로 들어와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가야 한다.’


이번에는, 한지운의 의지가 왕의 분노에 섞여 들었다.


‘막아야 해. 저들을…. 저 무고한 사람들을….’


두 개의 상반된 의지가, ‘화천회를 막는다’는 단 하나의 목표 아래 기묘하게 하나가 되었다.


“여봐라.”


왕의 목소리로, 지운이 말했다.


“저 재앙의 중심지로 향하는 길을 찾아서, 짐이 직접 이 버러지들을 벌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어떻게….”


박종윤은 절망적인 얼굴로 단말기를 가리켰다.


“도시 전체가 마비됐어요! 도로도, 통신망도…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요!”

“네놈의 그 번잡한 요물(妖物)이 아니라.”


왕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빛을 잃은 검은 옥 거북을 들어 보였다.


“이것으로 길을 찾는다.”


그는 옥 거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 옥 매미의 문양을 그 위에 가져다 댔다.


화악-!


왕의 검푸른 기운이, 옥 거북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사공의 신물이었던 옥 거북이, 새로운 주인의 힘을 받아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거북의 등껍질 위로, 희미한 빛의 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울의 지맥(地脈)을 나타내는, 고대의 지도였다. 수많은 지맥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푸른빛의 건강한 맥과, 썩은 피처럼 검붉은 빛을 내뿜는 오염된 맥.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이, 단 한 곳을 향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폐쇼핑몰.


“저곳이다.”


왕이 지도의 중심을 가리켰다.


“저곳에, 세 번째 ‘북’이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되찾기 위한 전쟁터로 향하는 왕이었다.


“가자.”


그가 선언했다.


“가서, 짐의 것을 되찾고. 감히 왕을 능멸한 쥐새끼들에게, 진짜 절망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것이다.”


세 사람은 하수 처리장의 어둠을 빠져나왔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옥으로 변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하늘은 불길한 녹색과 보라색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거리에는 버려진 차들과 넋 나간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하늘의 상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자도, 우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공포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영혼이 서서히 증발하고 있는 빈 껍데기들.


이것이, 화천회가 만들어낸 신의 놀이터였다. 모든 의지와 감정이 사라진, 거대한 인형의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중심, 폐쇼핑몰의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신의 강림을 위한, 마지막 제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폐쇼핑몰 ‘유토피아’.

그 이름은 이제 잔인한 농담처럼 들렸다.


10년 전, 서울의 변두리에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첫 삽을 떴던 거대한 프로젝트. 하지만 자금난과 부실공사, 그리고 수많은 비리가 뒤얽혀, 결국 완공을 보지 못한 채 흉물로 버려졌다. 수천억의 욕망과, 수백 가구의 파산한 꿈이 뒤엉킨, 현대의 무덤. 화천회는, 이곳을 세 번째 ‘문’을 열 제단으로 선택했다. 세 사람은 쇼핑몰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섰다. 콘크리트 골조를 드러낸 채 멈춰버린 건물은, 거대한 괴물의 갈비뼈처럼 보였다. 깨진 유리창은 해골의 텅 빈 눈구멍 같았고, 바람이 철골 사이를 지날 때마다 죽어가는 자의 신음 같은 소리가 울렸다. 고대의 유적과는 다른, 썩어가는 현대 문명의 악취가 진동했다.


“이곳입니다.”


박종윤이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그의 화면에는, 붉은 경고 메시지가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데이터가 말이 안 돼요. 주변 전자기장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 지역의 모든 데이터 패킷이... 그냥 증발하고 있어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건 그냥,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에요.”


그의 말대로였다. 지운의 눈에, 쇼핑몰은 거대한 검은 태풍처럼 보였다. 도시 전체의 오염된 지맥이, 이곳을 향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 가장 깊은 곳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악의가 잠들어 있었다. 세 번째 ‘북’이었다.


'과연, 훌륭한 제단이로군.'


왕의 목소리가, 지운의 머릿속에서 만족스럽게 울렸다.


“고대의 원념보다, 현대의 절망이 훨씬 더 진하고 달콤한 법이지.”


그들은 쇼핑몰의 지하 주차장 입구로 향했다. 굳게 닫힌 철제 셔터는, 마치 지옥의 문처럼 보였다. 왕이 손을 들자, 셔터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화천회의 암살자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곳을 떠돌던 부랑자들과, 공사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인부들의 원혼이었다. 그들의 희미한 형체는 낡은 작업복과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화천회의 악의에 잠식당해, 자신들의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어어어….”


원혼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세 사람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하찮은 것들.”


왕은 손을 들어, 그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잠깐만요!”


서화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이들은 적이 아닙니다. 피해자예요. 당신의 힘으로 이들을 소멸시키면, 저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해요.”

“구원이라.”


왕이 비웃었다.


“약한 자들에게, 그런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다. 길을 막는 것은, 그저 치워야 할 돌멩이일 뿐.”


‘아니.’


지운의 의식이, 왕의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의 말이 맞아. 이들을 구할 방법이… 있어.’


그는 자신의 기억, 기록자의 지식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그는 서화를 돌아보았다.


“서화 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네?”

“파수꾼의 피는, 길을 지키는 동시에 길을 잃은 자를 인도하는 힘이 있죠. 당신의 피로, 저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악의를 잠시나마 걷어낼 수 있겠습니까?.”


서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 피를, 주차장 바닥에 원을 그리듯 뿌렸다. 그리고, 오래된 진혼곡(鎭魂曲)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슬펐지만, 어둠을 가르는 등불처럼 맑게 울려 퍼졌다.


“어둠에 잠든 넋이여, 길을 보아라. 원한의 굴레를 벗고, 빛을 따르라.”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핏방울들이 붉은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나비들은 달려들던 원혼들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크… 으… 아….”


원혼들의 몸부림이 멎었다. 그들의 붉은 눈동자에서, 서서히 악의가 걷히고, 생전의 슬픔과 고통이 떠올랐다.


“지금!”


지운이 외쳤다.


“그들의 ‘기록’을 읽고, 그들을 해방시켜야 해요!”


그는 원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눈이, 눈부신 순백의 빛을 발했다. 그는 그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추락하는 비명, 쇠파이프에 짓눌리는 고통,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홀로 맞이한 죽음. 그들의 삶, 그들의 죽음, 그들의 슬픔. 그 모든 것을, 기록자로서 받아들이고, 공감했다.


“고맙….”


원혼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형체가,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이 지박령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든 원혼이 사라졌을 때, 지하 주차장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서화는 탈진한 듯 비틀거렸고, 지운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수십 개의 기록을 받아들인 대가는 혹독했다. 수십 명의 마지막 고통이, 그의 영혼에 희미한 상처처럼 남았다.


“이제….”


박종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야죠.”


세 사람은 다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쇼핑몰의 심장부. 세 번째 ‘북’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거대한 제단을 향해.




지하 주차장의 철문이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 그들이 알던 쇼핑몰의 모습이 아니었다.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는 거대한 선사시대 짐승의 앙상한 갈비뼈처럼 천장을 향해 뻗어 있었고, 한때 화려했을 유리 돔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병든 짐승의 내장처럼 녹색과 보라색으로 뒤틀려 맥동했다. 공기는 무거웠다. 젖은 콘크리트와 곰팡이,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 - 인간의 탐욕과 절망이 썩어가는 듯한 시큼하고 달콤한 악취가 폐부를 찔렀다.


"이게... 쇼핑몰이라고?"


박종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단이에요. 거대한 제단."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화천회가 자신들의 어둠의 신을 맞이하기 위해, 현대 문명의 시체 위에 세운 거대한 사원(寺院)이었다. 벽면 곳곳에는 붉은 부적들이 마치 악성 종양처럼 번져 있었다. 그 문양들은 - 지운이 할아버지의 금제록에서 본 것과 흡사한 -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어떤 것은 뱀처럼 기어 다녔고, 어떤 것은 심장처럼 박동했다.


"저것들이..."


왕의 목소리가 지운의 의식 속에서 낮게 울렸다.


"저것들이 바로 공간을 뒤트는 주술이구나. 한(漢) 말기, 황건적들이 사용했던 미혹술과 유사하군."

"조심해요."


서화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부러진 팔이 욱신거렸지만, 다른 손으로 벽의 부적들을 가리켰다.


"저건...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의 변형이에요.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진법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든 게 거짓일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으악!"


박종윤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허공에 발을 헛디디며 뒤로 넘어졌다. 지운이 재빨리 그의 옷깃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떨어졌을 것이다. 박종윤이 밟으려 했던 단단해 보이는 대리석 바닥은, 사실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이었다. 그 깊이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마워... 고마워요..."


박종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환술은 점점 더 교묘해졌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갑자기 거대한 거미로 변해 천장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샹들리에로 돌아갔다. 바닥의 타일 문양은 수천 개의 눈알로 변해 그들을 응시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평범한 타일이 되었다. 서화의 눈앞에는, 더욱 잔인한 환영이 펼쳐졌다. 그녀가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 부검대 위에서 차갑게 식어갔던 시신들이, 하나둘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우리를 구하지 못했어?' '당신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하찮은 장난질이군."


왕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지운의 몸 속에서, 왕의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감히... 이런 삼류 술법으로, 짐의 눈을 가리려 하다니. 이 무례한 것들!"


왕의 비취색 눈동자가 지운의 눈을 통해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환영이 깨진 거울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평범해 보였던 복도는, 바닥에서 수십 개의 녹슨 철근이 죽음의 창처럼 솟아난 함정이었다. 철근 끝에는 이미 희생된 누군가의 옷자락이 걸려 바람에 펄럭였다. 아름다운 분수대로 보였던 것은, 시커먼 피가 끓어오르는 구덩이였고, 그 속에서는 수십 개의 창백한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려 허공을 휘저었다. 천장의 장식품들은 사실 거대한 그물이었고, 바닥의 카펫은 끈적이는 점액질로 덮여 있었다.


"이런..."


박종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태블릿을 꺼내 들었지만, 화면에는 의미 없는 노이즈만 가득했다.


"전자기장이 완전히 교란됐어요. GPS도, 통신도...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된 거예요."

"그럼 어떻게..."


서화가 말을 시작했지만, 지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운은 눈을 감았다. 왕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 기록자의 눈을 열었다. 순간, 시간의 층위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이 촉박해. 자재를 좀 빼돌려도 괜찮겠지?'

'이 철근 몇 개쯤은... 아무도 모를 거야.'

'감독관한테 뇌물 좀 먹이면 되잖아.'


15년 전, 이 쇼핑몰이 지어질 때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노동자들의 땀과 피. 그들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배신한 비리와 부패의 흔적들. 수백 톤의 시멘트를 빼돌린 자들. 철근을 반으로 줄인 자들. 그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빈 공간'들이, 검은 혈관처럼 건물 전체에 퍼져 있었다.


"찾았다."


지운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왕의 비취색과 자신의 검은색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이 건물의 진짜 지도는, 설계도에 없습니다. 부실공사가 만들어낸 '공백'들... 화천회도 모르는 비밀 통로들이 있어요."


그는 일행을 이끌고 화려한 중앙 홀을 피해, 'STAFF ONLY'라고 적힌 녹슨 철문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지운이 특정 지점을 누르자 '찰칵' 소리와 함께 열렸다. 15년 전, 한 노동자가 몰래 만들어둔 비상구였다.


"믿을 수 없어..."


박종윤이 중얼거렸다. 문 너머에는 좁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벽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에는 화천회의 부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조차 이 공간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세 사람은 손전등을 켜고 통로를 따라 전진했다. 발걸음 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 감각이 흐려질 무렵, 전방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둥-.


거대한 북소리였다. 아니, 북소리라기보다는... 심장 박동 소리에 가까웠다.


둥-.


"뭔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서화가 속삭였다.


둥-.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심장도 그 리듬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존재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통로의 끝, 벽에 작은 균열이 있었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을 뻔했다. 거대한 중앙 아트리움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5층 높이의 웅장한 공간. 하지만 그곳은 이미 인간 세상의 풍경이 아니었다. 바닥은 거대한 핏빛 호수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명의 희생자들의 피와 영혼이 뒤섞여 만들어진, 살아있는 호수였다. 표면에서는 간간이 얼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비명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호수의 정중앙에는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제단은 피라미드 형태였고, 각 층마다 기괴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뱀과 용, 그리고 이름 모를 괴물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제단의 정상에는...


"저게... 세 번째 열쇠?"


박종윤이 숨을 삼켰다. 거대한 북이 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북. 할아버지의 금제록에 그려져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북의 표면은 일반 가죽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었다. 거대한 생명체의 피부처럼 숨을 쉬고 있었고, 표면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맥동했다.


둥-. 둥-. 둥-.


제단 주변에는 수백 명의 화천회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북의 박동에 맞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 아... 그분이 오신다..."

"별들이 정렬하고... 문이 열린다..."

"피로써... 영혼으로써... 길을 닦으리..."


그리고 제단 위, 북 앞에 선 자는...


"죽연."


지운이 이를 악물었다. 죽연은 판교의 유리탑에서 입었던 상처가 완전히 아문 듯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연기처럼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 같았다. 그는 양팔을 하늘로 뻗은 채,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오늘! 바로 오늘이다!"


그의 목소리가 아트리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천 년의 기다림이 끝났다! 가장 높은 곳의 별이, 가장 낮은 곳을 비추는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잊혀진 신이 돌아온다!"


깨진 유리 돔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중심, 북극성이 마치 작은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종윤이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확인했다. 23시 57분.


"3분..."


그가 속삭였다.


"자정까지 3분 남았어요."


죽연이 뒤를 돌았다. 제단 아래 무릎 꿇은 신도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자비로운 성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의 충실한 종들이여.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될 영광스러운 제물들이여."


신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황홀경에 빠진 광신도들의 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희의 피로 강을 만들고, 너희의 영혼으로 다리를 놓으리라. 그리하여 위대한 존재가 이 세상으로 건너오리니..."


죽연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신도들이 일제히 품에서 은빛 단검을 꺼냈다. 단검의 날에는 붉은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영광이다!"

"영광이다!"

"새로운 신을 맞이하리!"


그들은 망설임 없이, 단검을 자신의 심장에 찔렀다.


"안 돼!"


서화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하지만 비명은 없었다. 고통의 신음도 없었다. 그들은 미소를 지은 채 죽어갔다. 그들의 피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핏빛 호수로 흘러들었다. 호수가 끓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품이 올라왔다. 무언가...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것은... 단순한 소환 의식이 아니구나. 저들은 이 세계 자체를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죽연의 뒤, 제단의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기록의 탑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화천회의 진짜 주인. 그는 검은 용포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옥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동자 대신 깊은 우주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천 년 전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구나."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때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완벽하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자, 아트리움 전체가 진동했다. 벽면의 부적들이 일제히 붉은빛을 발했다. 핏빛 호수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증기는 형체를 만들어냈다. 용의 형상, 뱀의 형상, 그리고 이름 모를 괴물들의 형상이 공중에서 춤을 췄다. 박종윤이 시계를 보았다. 23시 59분 30초.


"30초..."

"시작하거라."


노인이 명령했다. 죽연이 제단 옆에 놓인 거대한 북채를 들어 올렸다. 북채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었다. 검고 뒤틀린, 마치 거대한 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북채 끝에는 인간의 두개골이 달려 있었다. 그가 북채를 높이 들어 올렸다.


15초.


"이제..."


죽연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새로운 시대가..."


10초.


바로 그때였다.


쾅!


아트리움의 반대편 벽이 폭발하듯 부서졌다. 연기와 먼지 사이로, 수십 명의 검은 복장을 한 인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특수기동대다! 전원 동작 금지!"


선두에 선 것은 최민준 형사였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옆에는 방탄조끼를 착용한 장서린 박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의연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출동 직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박사님은 법의학자입니다. 현장 요원이 아니란걸 알고 있어요!"


최 형사가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 건데요!"


장서린이 반박하려 했지만, 최 형사가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사건의 시신들은 부검실에서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을 겁니다, 박사님. 당신이 직접 와서 '살아있는 죽음'을 봐야 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무엇과 싸우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화천회 신도들이 동요했다. 몇몇은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특수기동대의 움직임은 빨랐다. 섬광탄이 터지고, 최루가스가 퍼졌다. 그러나 노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이래야지. 위대한 의식에는 증인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는 최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똑똑히 보거라.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순간을!"


5초.


죽연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늦었어, 어리석은 인간들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3초.


"모두들..."


최민준이 외치려 했지만-


2초.


1초.


자정. 죽연이 온 힘을 다해, 거대한 북을 내려쳤다.


꽈앙!


그 소리는 단순한 북소리가 아니었다. 천둥과 지진, 화산 폭발과 해일이 합쳐진 듯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소리였다. 그 진동이 공간을 찢고, 시간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중에, 현실의 장막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무언가가 보였다.

끝없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거대한 눈동자.


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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