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57화

새로운 동맹

by 돌부처

“그럼….”


박종윤의 목소리가, 지하 기지의 차가운 정적을 갈랐다.


“이제 우린 뭘 해야 하죠?”


그의 질문은 무게를 잃고 허공에 흩어지는 듯했다.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의 무너진 세계 위에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서화는 왕의 독이 흐르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변한 용의 문신은 이제 고통 대신, 섬뜩한 힘의 일부가 되어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낯선 힘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자신이 짐이 될지, 혹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예리한 무기가 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혼돈 속으로 사라지던 한지운의 마지막 눈빛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장서린은 고성능 전자 현미경 속, 살아 움직이는 이계(異界)의 물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과학의 정의,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녀의 신념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눈앞의 이 검은 재는, 그 어떤 물리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물질이자 정보였고, 죽음이자 생명이었다. 그녀는 과학자로서의 오만을 버리고, 미지의 존재 앞에서 겸허한 관찰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박종윤. 그는 깜빡이는 모니터 속, 친구가 남긴 황금빛 등대를 보며 이 불가능한 암호를 풀어낼 실마리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친구의 얼굴 사진 옆으로, 그의 심장이 멈췄을지도 모를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그는 슬퍼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슬픔은, 친구를 되찾은 뒤에 얼마든지 쏟아낼 수 있었다. 지금은, 냉철한 이성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들은 패배했다. 완벽하게. 하지만 동시에,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었다.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서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직설적이었지만, 이전의 냉소 대신 무거운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하늘의 저 흉터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에요. 제 분석으로는, 저 틈새를 통해 이쪽 세계의 엔트로피가 저쪽으로 유출되고 있어요. 쉽게 말해, 세상의 ‘수명’이 빨아먹히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리 법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녀는 모니터에 복잡한 그래프를 띄웠다. 전 세계의 지진파, 해류, 기상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보세요. 지난 몇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세 지진이 수백 건 이상 발생했어요. 극지방의 빙하 코어 온도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고 있고요.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이 속도라면, 한 달 안에 지구 전체의 자기장에 이상이 생기고, 생태계 붕괴가 시작될 겁니다. 이건 핵전쟁보다 더 조용하고, 더 확실한 종말이에요.”

“그뿐만이 아니죠.”


서화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은, 하늘의 흉터 너머,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 문은, 이제 화천회와 뱃사공만의 길이 아닙니다. 문 너머, 혼돈 속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존재들이 있어요. 굶주린 것들, 호기심 많은 것들, 혹은 그저 순수한 파괴를 즐기는 것들. 그들이 이쪽 세상의 ‘냄새’를 맡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둑에 난 작은 구멍으로, 댐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요.”


세 사람의 시선이, 박종윤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제, 이 기묘한 팀의 브레인이자 관제탑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박종윤이 말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운이가 남긴 저 ‘기록’을 해독해야 해요. 저 안에, 모든 답이 들어있을 겁니다. 저 혼돈의 신을 막을 방법, 그리고… 지운이를 되찾아올 방법까지도.”


그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에, 한상현 박사의 『금단의 기록』 원본이 스캔된 이미지로 떠올랐다. 고대의 상형문자와 기하학적 도형들이 빼곡했다.


“할아버님의 기록과, 지운이의 기록. 완전히 다른 언어지만, 근원은 같을 겁니다. 제가 개발한 양자 패턴 분석 알고리즘으로 두 데이터를 교차 분석하면, 무언가 공통된 ‘키워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때였다. 지하 기지의 육중한 철문 너머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세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곳은 박종윤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기지. 화천회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가. 박종윤이 조심스럽게 인터폰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최민준 형사였다.


“어떻게… 여길…?”


박종윤이 놀랐다. 그는 이 기지의 위치를 그 어떤 데이터로도 남기지 않았다. 최 형사는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나무패를 보여주었다. 지산 노인이 주었던, ‘風’ 자가 새겨진 나무패.


“이게… 길을 알려주더군요. 바람이, 당신들의 냄새를 여기까지 실어왔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문 좀 열어주시죠. 이제 우리, 같은 배를 탄 것 같으니.”


잠시 망설이던 박종윤은, 결국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문이 열리고, 최민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파괴된 연구소와, 녹초가 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늘의 흉터를 가리키는 모니터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찰로서의 냉철함과 한 인간으로서의 깊은 고뇌가 뒤섞여 있었다.


“상황은… 대충 파악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저 역시 답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그가 밤새 정리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었다. 한지운과 한상현의 기록, 화천회 관련 정보, 그리고… 월하 연구회의 마지막 생존자, 지산 노인과의 대화록까지.


“이제, 정보를 합칠 시간입니다.”


최 형사가 선언했다. 네 사람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파수꾼의 고대 지식, 과학자의 첨단 분석, 해커의 정보력, 그리고 형사의 집요한 추리. 마침내,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네 개의 톱니바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되어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명확했다. 하늘의 등대를 해독하고, 혼돈 속에 갇힌 기록자를 되찾아올 방법을 찾는 것. 그리고 동시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화천회의 검은 그림자를 추적하는 것. 이것은 이제, 도망치는 싸움이 아니었다. 먼저 칼을 뽑아야 하는, 위험한 사냥의 시작이었다.



테이블 위, 네 개의 세상이 충돌했다. 한쪽에는 최민준 형사가 밤새 정리한 수사 파일이 산처럼 쌓였다. 끔찍한 현장 사진, 용의자들의 신상 정보, 복잡한 관계도. 차갑고 논리적인 법의 세계. 다른 한쪽에는 한상현의 『금단의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 불가능한 상형문자와 별자리 그림. 수천 년의 비밀을 품은 주술의 세계. 그리고 그 사이, 장서린의 현미경이 보여주는 검은 재의 입자와, 박종윤의 모니터에 떠 있는 황금빛 등대의 파동 그래프가 두 세계를 위태롭게 연결하고 있었다. 전쟁은, 정보전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적부터 알아야 합니다.”


최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화천회의 핵심 인물로 추정되는 자들의 사진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정재계 인사, 유명 연예인, 사이비 종교 교주. 사회의 빛나는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의 가면 뒤에 숨은, 추악한 민낯이었다.


“이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입니다. 자금은 수백 개의 유령 회사를 통해 세탁되고, 연락은 절대 추적 불가능한 암호화 채널을 이용하죠. 지금까지는, 그저 거대한 범죄 카르텔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카르텔이 아니에요, 형사님.”


장서린이 현미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이건… ‘군체’에 가깝습니다. 보세요.”


그녀는 현미경 화면을 메인 스크린에 띄웠다. 화면에는, 검은 재 입자들이 서로 신호를 보내듯 미세하게 빛을 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입자들은 개별적으로 움직이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어요. 마치 개미 군체처럼. 아마 화천회 신도들도,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걸 겁니다.”

“그 명령을 내리는 자가, 바로 그 ‘주인 어르신’이겠지.”


서화가 『금단의 기록』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늘의 별자리 아래 제사를 지내는 검은 용포의 사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파수꾼의 기록에 따르면, 화천회는 언제나 ‘천문(天文)’을 이용해 움직였습니다. 별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날, 땅의 혈맥이 가장 약해지는 곳을 찔러,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거죠.”

“잠깐만요.”


박종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천문… 별자리….”


그는 미친 듯이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등대에서 쏟아지는 방대한 데이터. 그 안에서, 그는 서화가 말한 ‘패턴’을 찾고 있었다.

수십 개의 창이 뜨고 사라졌다. 그의 양자 컴퓨터가, 인간의 뇌로는 수백 년이 걸릴 연산을 단 몇 분 만에 해치우고 있었다.


“찾았어….”


그가 중얼거렸다. 화면에, 하나의 기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지운이 보내는 신호 속에서, 수억 번 반복되고 있는 핵심 패턴이었다. 마치 디지털 지문처럼.


“이 문양….”


서화가 화면을 보고 숨을 삼켰다.


“이건… 고대 북두칠성을 본떠 만든, 왕가의 비전 진법(秘傳 陣法)이에요. 일곱 개의 별을 이용해, 일곱 개의 저주를 거는….”

“맙소사.”


최민준이 서류 더미 속에서, 낡은 신문 기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난 수십 년간, 서울에서 벌어진 미제 연쇄 살인 사건. 피해자는 모두 일곱 명. 그리고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그는 지도 위에, 일곱 개의 점을 찍었다.그것은, 서화가 말한 북두칠성의 진법과 정확히 일치했다. 모든 조각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화천회는 수십 년에 걸쳐, 서울이라는 거대한 제단 위에 자신들의 저주를 새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장서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의 마지막 제물은….”

“한지운 박사.”


최민준이 대답했다.


“가장 강력한 기록자의 피를 가진 마지막 후예. 그를 제물로 바쳐, 진법을 완성하고 ‘문’을 열려는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박종윤이 외쳤다. 그의 눈은 이제, 공포를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집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지운이는 제물이 아니야! 저 신호는… 저 문양은 저주가 아니라고!”


그는 두 개의 기록, 할아버지의 책과 지운의 신호를 오버랩시켰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화천회의 저주 진법은, 북두칠성의 일곱 별을 일직선으로 이은 ‘검’의 형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기록에 나온 원래의 진법은, 일곱 별을 원형으로 이어, 중앙의 북극성을 감싸는 ‘방패’의 형태였다. 그리고 지운이 보내는 신호는, 그 방패의 진법에, 자신만의 새로운 ‘좌표’를 더하고 있었다.


“이건….”


서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의 진법을, 반대로 뒤집어 봉인하는 ‘역(逆) 진법’이에요. 그는… 그는 저 혼돈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태워가며 우리에게 해답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군요.”


장서린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태블릿에, 역진법의 구조를 빠르게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화천회가 만든 일곱 개의 저주 지점을, 우리가 반대로 짚어나가야 해요. 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봉인을 완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일곱 번째 지점은….”


최민준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바로, 화천회가 마지막 의식을 벌였던, 폐쇼핑몰 ‘유토피아’입니다. 그곳은 이미….”

“상관없습니다.”


서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결연한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지운 씨가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갈 차례입니다.”


네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화천회의 저주를 풀고, 친구를, 세상을 구하기 위한 위험한 순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지하 기지의 모든 전력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꺼졌다.


“정전…?”

“아니.”


박종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건… 외부로부터의 완벽한 차단이야.”


그의 메인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다시 켜졌다. 화면에는, 검은 강물 위를 유유히 떠가는 낡은 나룻배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폰을 통해. 수십 명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이한 뱃사공의 목소리가. 지하 기지 전체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재미있는 놀이는… 나 또한 끼어야지.”


뱃사공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 지하 기지에는 죽음보다 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든 전력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 오직 메인 스크린만이 꺼지지 않는 유령처럼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화면 속, 검은 강물 위를 떠가는 나룻배의 모습은, 마치 그들 모두의 운명을 실어 나르는 장송곡의 한 장면 같았다.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박종윤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보조 컴퓨터로 달려갔다.


“물리적 차단이 아니야. 외부 회선은 살아있어. 그런데 왜… 왜 나갈 수가 없지!”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 수십 개의 방화벽, 수백 개의 암호화 프로토콜.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철옹성은, 그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성은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다. 모든 비상 탈출 프로토콜은 먹통이었고, 육중한 강철문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소용없습니다.”


서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스크린 속, 얼굴 없는 뱃사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법칙’이에요. 저 존재가 나타나는 순간, 이곳은 이미 우리의 세상이 아닌 겁니다. 저 강물이 흐르는, 저 자의 ‘영역’이 된 거예요.”

“영역…?”


장서린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과학적 이성이,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비과학적인….”

“강을 건너려는 자는, 뱃사공에게 삯을 내야 하는 법.”


뱃사공의 목소리가, 다시 그들의 뇌리에 직접 울렸다.


“너희는 지금, 나의 강 한복판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대가?”


최민준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남색 눈동자가, 스크린 속 어둠을 꿰뚫으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원하는 게 뭐냐.”

“너희가 가진 가장 귀한 것.”


뱃사공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너희의 영혼을 이루는 가장 빛나는 조각. 너희의… ‘기억’이다.”


……!


네 사람 모두, 숨을 삼켰다. 박종윤의 키보드 소리가 멎었다.


“한 사람당, 하나의 기억. 가장 아프거나, 가장 행복했던. 너희를 지금의 너희로 만든, 가장 선명한 기억의 조각을 내게 바쳐라. 그러면, 길을 열어주마.”

“거부한다면….”


화면 속, 강물 아래에서 수많은 창백한 손들이 솟아 나와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 비쳤다.


“너희 또한, 이 망각의 강을 영원히 떠도는 나의 수집품이 될 뿐이다.”


그것은 협박이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담담한 선언이었다.


“미친 소리….”


장서린이 중얼거렸다.


“기억은 뇌의 전기화학적 신호일 뿐이야. 어떻게 그걸….”

“저 자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화폐입니다.”


서화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뱃사공은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자. 그에게 기억은,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추와 같아요. 그는 그렇게, 수천 년간 망자들의 기억을 수집하며 이 강을 지배해왔습니다.”

“그럼… 어떡해야 합지?”


박종윤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우리 기억을 저놈에게 줘야 한다는 겁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일부를, 저 미지의 존재에게 스스로 내어주는 행위. 그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는 다른, 영혼을 도려내는 듯한 공포였다.


“내가 하지.”


침묵을 깬 것은, 최민준이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낡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 한 개비를 부서져라 매만질 뿐이었다.


“형사님….”

“어차피, 잊고 싶은 기억 따위는 산더미처럼 있으니.”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크린을 향해 마주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좋다, 뱃사공.”


그가 말했다.


“네놈이 원하는 게 이야기라면, 들려주지. 내가 왜, 이 지긋지긋한 괴물들을 쫓게 되었는지.”


그의 눈앞에, 10년 전의 풍경이 펼쳐졌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폐창고. 이제 막 현장에 투입된, 의욕 넘치던 신참 시절의 자신. 그리고, 그의 곁에서 웃고 있던 파트너, 김 선배.


“민준아, 너무 앞서가지 마. 저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야.”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제가 다….”


자만심. 공명심. 그는 선배의 경고를 무시하고, 홀로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그것’과. 그의 눈앞에서, 선배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절망.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밀치며 외치던 선배의 목소리.


‘살아… 살아남아서… 전부… 잡아넣어….’


“크윽….”


최민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그것은 한 줄기 회색빛 연기가 되어, 스크린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화면 속, 검은 강물 위로. 최민준의 기억이, 한 편의 흑백 영화처럼 펼쳐졌다. 비명, 핏물,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 남겨진 세 사람은, 말없이 그의 가장 깊은 상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상영이 끝났을 때. 지하 기지 전체를 울리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강철문의 수많은 잠금장치 중, 단 하나가 풀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뱃사공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훌륭한 이야기였다, 형사. 첫 번째 뱃삯은, 받았다. 이제….”


화면 속, 얼굴 없는 뱃사공이, 남겨진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듯했다.


“다음 손님은, 누구지?”


뱃사공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다음 제물을 지목하는,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 최민준 형사는 등을 돌려 주저앉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가장 아픈 기억을 도려낸 그의 영혼은, 이제 텅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남은 것은 오직, 복수라는 차가운 집념뿐. 남겨진 세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가, 다음 차례가 될 것인가. 박종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모니터를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망설이듯 맴돌았다. 그에게는 기억이 너무나도 많았다. 밤을 새워 코딩에 성공했을 때의 희열, 처음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의 벅참. 그리고… 한지운과 함께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고고학과 기술의 미래를 논하던 그 수많은 밤들. 그 모든 것이 그의 일부였다. 무엇 하나 버릴 수 없었다. 그때, 장서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차가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제가 하죠.”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어차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기억 따위. 내게는 불필요한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스크린 속, 얼굴 없는 뱃사공을 마주 보았다. 마치 부검대 위의 시신을 분석하듯,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좋아, 뱃사공이든 뭐든.”


그녀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게 내 기억이라면, 가져가 봐. 대신, 똑똑히 봐. 네놈 같은 존재를, 내가 평생을 바쳐 어떻게 부정해왔는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앞에, 열일곱 살의 자신이 서 있었다. 갓 신내림을 받은 소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그 끔찍한 혼돈의 시작. 굿판이 벌어진 신당. 향냄새와 피비린내. 광기 어린 징소리.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어머니. 이 시대 최고의 만신(萬神)이라 불리던 여자.


‘서린아,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하늘이 내린 축복이야.’

‘싫어! 난 이런 거 싫다고!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신당을 뛰쳐나왔다. 그녀를 붙잡는 어머니의 애절한 손길을 뿌리치고,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쳤다. 과학의 세계로. 모든 것이 증명되고, 모든 것이 논리로 설명되는 세계로. 그녀는 자신의 반쪽을 스스로 부정하고, 오직 이성의 힘만을 믿으며 살아왔다. 그것이 그녀의 자부심이자,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였다.


“이제… 알겠나?”


장서린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이게 내 기억이야. 네놈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증명이라고.”


그녀의 뺨을 타고, 뜨거운 액체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평생을 부정해왔던, 무당의 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선홍빛 연기가 되어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흥미롭군.”


뱃사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의 기억이라. 아주 좋은 모순의 맛이야.”


철컥.


다시 한번, 강철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두 번째 뱃삯도, 잘 받았다. 이제, 남은 손님은 둘….”


뱃사공의 목소리가, 박종윤과 서화를 향했다. 박종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제가… 하겠습니다.”


서화가, 그를 막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지만, 그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깊었다.


“종윤 씨는… 안 됩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눈’이자 ‘기록’이에요.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돼요. 하지만 저는….”


그녀는 자신의 검게 변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이제, 과거를 버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스크린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파수꾼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모든 삶을, 그 지독했던 숙명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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